‘제인 오스틴을 처방해 드립니다’ 지은이 루스 윌슨. 출판사 제공


은색 가면을 쓴 예순명의 사람들이 주위를 에워쌌다. 예순번째 생일날이었으니 아마 깜짝 파티겠지. 자식들, 손주들, 이웃과 지인들까지 한자리에 모여 오직 나를 위해 박수와 환호를 보낸다. ‘내가 이렇게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구나’라는 감격에 겨워 눈물이 왈칵 쏟아져야 하는데 웬걸. 정체 모를 반감이 단전에서부터 치밀고 이윽고 벼락처럼 진실이 당도한다. ‘아, 내가 세상에 정나미가 떨어졌구나. 조금도 행복하지 않다.’
‘ 릴게임추천 제인 오스틴을 처방해 드립니다’ 지은이 루스 윌슨(93·사진)은 예순살 생일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의 줄임말)임을 자각했다. 인생이 손 쓸 수 없게 망가졌다는 확신이 그날 들었다. 의사 남편, 장성해서 제 앞가림 하는 자식들, 건강하게 커나가는 손주들…. 남들 눈에는 “좋은 패를 풍성하게 받아 든” 삶이었지만 그는 쪽박 찬 심정을 떨칠 수 없었다. 어 쿨사이다릴게임 디서부터, 어떤 선택부터 꼬인 것인지, 갱생의 여지는 있는 것인지 추적할 시간과 공간이 절실했다. 그래서 갔다. 시드니에서 차로 두시간 떨어진 서던하일랜즈의 시골집으로. 제인 오스틴(1775∼1817)의 소설 6권을 품고. 철저히 홀로.



제인 오스틴을 처방해 드립니다 l 루 검증완료릴게임 스 윌슨 지음, 이승민 옮김, 북하우스, 1만9800원


그곳에서 그는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n독’ 했다. 읽고, 또 읽었다. 혼자서도 읽고, 함께도 읽었다. 왜 하필 제인 오스틴이었을까. 열다섯에 처음 접한 오스틴은 그에게 독서의 지평, 나아가 삶의 지평을 확장해 준 작가였기 때문이다. 남성 작 릴게임하는법 가가 쓴, 남성 주인공의 모험기만 권장 도서 목록에 가득하던 시기, 도서관에서 만난 오스틴은 그에게 신선하면서도 신뢰할 만한 롤모델을 보여주었다. 어떤 남자에게, 어떻게 낙점받을지가 여자의 삶을 지배하는 주요 의제였던 시기, 제인 오스틴은 그것이 전부가 아닐 수 있음을 일러주는 일종의 ‘각성제’였다. “온 세상이 진리로 인정하다시피, 상당한 재산을 소유한 야마토릴게임 독신 남자에게는 아내가 필요하기 마련이다.” ‘오만과 편견’의 유명한 첫 문장은, 결혼은 여성에게 필요한 제도라고 철석같이 믿던 소녀에게 파격적인 명제였다. 흠모하는 남성에게 춤을 청했지만 거절당하고도 이를 유쾌하게 말하는 이 소설 속 주인공 엘리자베스 베넷은, “소심증”을 가진 의기소침한 소녀를 전율케 했다. 오스틴의 여자들은 성숙하진 않았지만 늘 성장을 향해 갔다. ‘결혼’과 ‘돈’이라는 주제로부터 떠난 적 없는 그의 소설은, 경제적 자립이 요원하던 그 시절 여성들에게는 실존의 문제를 진지하게 탐색하게 하는 거의 유일한 매체이기도 했다.
그렇게 오스틴과 관계 맺으며 성장했지만, 지은이는 ‘사회적 관습’이라는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혼을 선택한다. 대학 극단에서 배우로도 두각을 나타냈고, 학자가 될 야심과 재능도 있었으나 결국 “결혼 공화국의 이등 시민”이 되어 있었다. 오스틴은 부러 외면했다. “오스틴이 그려내는 동반자적 결혼 관계가 눈앞의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져 보였기 때문”이었다. 파도처럼 주기적으로 밀려드는 공허, 실패감에 이스라엘로 이민까지 갔었지만 소용없었고, 결국 그는 “두번째 기회”를 희망하며 시골집에서 오스틴과 대면했다.
60여년의 시차를 두고 다시 읽었지만 여전했다. “어떤 책들은 읽는 순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든 그걸 내어준”다. 마치 “주름 잡힌 옷감처럼 텍스트가 때에 따라 다른 부분의 무늬들을 드러내”(얼그레라 굿먼 ‘펨벌리 사전 방문’ 재인용)는 것이다. 오스틴은 18세기 인물이었지만, 젠더 불평등에 관한 한, 가부장제가 여성에게 가하는 압력에 관한 한, 많은 것들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문장에 밑줄이 그어졌고, 그때마다 새로운 기억들이 튀어나왔다. 지은이는 “독서 재활” 끝에 이러한 답에 이른다. “관습의 틀 안에 살기로 결정했을 때 나는 스스로를 기망한 거야. 안전한 삶에 안주한 줄 알았는데, 언젠가부터 튕겨 나가고 있더라.” 과거에서 빠져나온 그는 호기심과 사명감을 쥐고 나온다. 자신의 오스틴 읽기 방식을, 독서 교육 프로그램으로 확장하는 것이다. 자신과의 연결감을 확보하면서, 텍스트를 반복적으로 읽는 방식이 얼마나 삶에 유용한지 알리기로 한 그는 88살에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2022년에 이 책을 펴냈다.
제인 오스틴의 6개 작품에 대한 요약과 유머러스한 처방을 곁들여 상대적으로 오스틴과 멀었던 국내 독자들에게도 친절하게 다가온다. 작가의 캐릭터를 살려 구술체로 번역해 맛깔나게 읽힌다.



제인 오스틴의 책장 l 리베카 롬니 지음, 이재경 옮김, 휴머니스트, 2만2000원


이 책과 같은 날인 16일, 제인 오스틴 출생 250주년에 맞춰 출간되는 ‘제인 오스틴의 책장’은 오스틴의 작품에는 ‘신스틸러’로 등장하지만, 문학사에서는 사라진 여성 작가들을 발굴하고, 그들이 사라진 이유를 추적해 나가는 책이다. 희귀서 수집가이자 딜러인 지은이 리베카 롬니는 순전히 “예뻐서” 수집한 책 ‘에블리나’에 관한 정보를 찾다가 ‘프란시스 버니’라는 여성 작가와, 그가 쓴 ‘서실리아’라는 소설, 그리고 그 속에 ‘오만과 편견’이라는 문구가 주요하게 등장함을 발견하게 된다. 제인 오스틴의 열렬한 팬인데다 희귀서 수집을 업으로 하는 전문가에게도 너무나 낯선 이름 ‘프란시스 버니’. 그는 이 발견 이후 오스틴의 소설과 편지에 “빵 부스러기처럼 점점이 뿌려진 단서들을 하나둘씩 주워” 제인 오스틴의 오스틴이었던 선배 여성 작가 여덟 명을 하나씩 호명한다. “오스틴이 이 여성 작가들을 읽던 시기는 영국 역사상 처음으로 소설 출간작의 저자가 남성보다 여성이 많던 때”임에도, 오스틴이 글에 그토록 많은 단서를 뿌려놓았음에도, 이들이 영국 문학사에서 “생략되고 폄하되고 정전에서 밀려난” 순간들을 복원하는 이야기가 마치 추리소설처럼 전개된다. “유행이 지났다” “대필했다” “읽어야 할 이유는 없다”는 석연치 않은 평가 속에서 사라져간 그들. 오스틴이 열어젖힌 세계는 아직도 팽창 중이다.
최윤아 기자 a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