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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서울 반포 자택에서 포즈를 취한 천경자 화백. 그는 화단과 대중에게 모두 인정받은 여성화가로서, 한국 현대미술사에 강렬한 빛을 남겼다. 연합뉴스
◇“요상한 그림이 사우나에 걸렸다”=1973년 서울 현대화랑에서 열린 전시회에 관람객이 길게 줄을 지어 입장을 기다렸다. 마지막 날엔 그 줄이 인사동을 지나 안국동까지 뻗었다. 전시회 작가는 천경자(千鏡子·1924∼2015). 큰 키에 하이힐, 이국적 마스크에 긴 생머리, 강렬한 색상의 옷차림으로 유명한 여성 화가였다. 일제 강점기 오션파라다이스다운로드 에 태어나 ‘여자 환쟁이’에 대한 편견을 뚫고 30세에 홍익대 미대 교수, 54세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된 인물이었다.
그런 작가의 삶은 67세가 되던 1991년 한 사건에 휘말리며 엄청나게 굴절됐다. 바로 ‘미인도’ 진위 논란이다. 이 사건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움직이는 미술관’ 전시를 하며 소장품의 복제 포스터를 판매한 데서 비롯됐다. 골드몽릴게임 천경자 이름을 단 복제화도 원작(29×26㎝)보다 큰 사이즈(44.5×40㎝)로 만들어 팔았다. 이 중 하나가 어느 건물 사우나에 걸려 있는 것을 천경자 지인이 보고 작가에게 “요상한 그림이 전시되고 있다”고 알렸다.
천경자는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인 원작을 본 후 “허깨비처럼 보이는 이런 작품을 내가 그린 적이 없다”고 했고, 이 주장이 릴게임바다이야기 언론에 보도되면서 예술계를 넘어선 사회 사건이 됐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위임을 받은 한국화랑협회는 3차에 걸친 감정을 통해 해당 작품을 진품으로 판정했다. 작가는 이 일에 실망을 표하며 미국으로 건너간 후 거기서 말년을 보냈다. “그 일만 생각하면 식도가 고통스럽습니다.” 천경자는 지인에게 보낸 엽서에 그렇게 썼다. 이 와중에 권춘식이라는 위작범이 등장해 바다이야기모바일 자신이 미인도를 그렸다고 했다가 수차례 말 바꾸기를 하며 흙탕물을 튀겼다.
작가 타계 후인 2016년 유족의 고소·고발에 따라 수사에 착수했던 검찰이 그 결과를 “진품으로 판단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작가를 잘 아는 평론가들과 유족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2025년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은 홈페이지 소장품 목록에서 천경자 작품 10개를 소개하 야마토게임연타 면서도 ‘미인도’는 뺐다. 현재형인 논란을 의식해서일 것이다.
위작 논란을 일으킨 ‘미인도’. 오른쪽 그림은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 스케치로 알려졌으나, 그의 차녀(김정희 미국 몽고메리대 교수)는 아니라고 부인했다.
◇“도대체 진실은 뭔가”= 양쪽 주장은 지금도 팽팽하다. 오광수·정준모, 김종근·최광진 등 당대 걸출한 평론가들이 각각 진품, 위작 쪽에 서서 방대한 증거를 제시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100분 토론’이 아니라 ‘100일 논쟁’으로도 끝나지 않을 듯싶다.
진품 쪽 주장의 가장 큰 핵심은 이 그림이 이미 1990년 1월 1일 발간된 ‘한국미술전집’ 한국화편 11권에 ‘나비와 여인’(1977년 작)이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는 것이다. 이 작품의 복제를 천 화백이 승인한 문서도 있다. 복제품이 커서 벙벙하게 느껴진 탓에 그가 착각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한국화랑협회 감정위원들이 수차례 진품으로 감정한 것, 검찰이 수사할 때 참고한 작품 출처와 석채 안료,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적외선 촬영 등도 유력한 증거다.
위작 쪽 주장의 핵심은 홍채와 입술 등을 표현하는 방식이 천 화백 풍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석채로 겹칠을 한 작가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미인도는 깊이가 현저하게 떨어진다. 프랑스 뤼미에르광학연구소 팀이 단층 촬영한 결과 진품 확률이 0.0002%라고 했던 것이 그걸 뒷받침한다. 무엇보다 “내 자식을 내가 몰라보겠느냐”고 한 작가의 말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천경자는 화상(畵商)의 간청에 못 이겨 그림을 팔고는 밤새 잠을 못 잤다며 다음 날 되돌려받는 일이 수차례 있을 정도로 작품을 분신처럼 사랑했다.
사안을 복잡하게 만든 또 다른 원인은 이 미인도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집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당시 신군부는 김재규 자택에서 압수한 물품 중 미인도 등을 국립현대미술관에 이관했다. 미술관은 1980년부터 이를 소장했는데, 복제품 판매를 계기로 사달이 난 것이었다.
이와 관련, 진품 주장 쪽에서는 “이른바 국사범(國事犯) 집에서 자신의 작품이 나온 것을 천 화백이 꺼림칙하게 여겼을 것”이라고 했고, 위작 쪽에선 “신군부가 김재규를 부정부패 인물로 만들기 위해 진품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로써 보면, 미스터리 영역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1991년 당시 국립현대미술관 쪽 주장에 가세했던 김창실 화랑협회장이 나중에 “신만이 아실 것”이라고 했던 것은 솔직한 고백이었다.
천 화백 10주기 특별전(서울미술관)에 나온 누드화.
◇‘슬픈 전설’의 찬란함=‘찬란한 전설 천경자’(A Splendid Legend Chun Kyung-Ja). 100여 년 전통의 이탈리아 명문 출판사 스키라(SKIRA)가 곧 발간하는 도록 제목이다.
천경자는 한국 현대미술사를 자신의 빛으로 밝힌 거장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예우는 미흡했다. 1983년 은관문화훈장을 수여했던 정부가 그의 사후에 금관훈장을 추서하지 않은 것이 대표적이다. 국립예술기관과 맞서며 미인도 논란을 일으켰다는 원죄에 그를 가둔 것이다.
“이제 진위 논란을 넘어 작가의 예술혼을 기려야 할 때다. 대중이 그의 작품 세계를 제대로 즐길 수 있도록 하자.”
민간 뮤지엄인 석파정 서울미술관이 특별전 ‘내 슬픈 전설의 101페이지’(2025.9.24∼2026.1.25)를 마련한 취지다. 이 전시는 천경자 타계 10주기를 기리는 동시에 탄생 101주년을 재조명 원년으로 삼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이 전시에 나온 작품 84점을 보다가 예기치 않게 목울대가 뜨거워졌다. 자신의 삶을 슬픈 전설이라고 한 예술가의 고투와 자존이 오롯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식민지 여성으로 태어나 차별과 싸우고, 이혼녀라는 손가락질을 견디며 전쟁과 가난 속에서 2남 2녀를 홀로 키워야 했던 시간들. 예술 세계를 이토록 돌올하게 가꾸기까지 그 한(恨)이 얼마나 깊었을 것인가.
서울미술관 대표 안진우는 “각 기관·단체와 개인 소장 등으로 흩어져 있는 작품들과 자료를 모으는 과정이 너무 힘들어서 몇 번이나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그 눈물의 결과로 슬픈 전설을 오늘 여기에 찬란히 드러냈으니 그 보람을 한껏 느껴도 좋겠다. 천상의 작가도 미쁘게 여길 것이다.
◇‘미인도’가 아니라 ‘여성 초상화’=천경자는 수묵화에 비해 천대받던 전통 채색화에 현대성을 부여한 작가다. 자전적 세계를 초현실주의적 분위기로 표현해 새로운 미학의 길을 열었다.
첫 여성 서양화 작가인 나혜석보다 28년 늦게 태어난 그는 남성에게 의지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사회적 성공을 이뤄 냈다. “오롯이 자신의 힘으로, 홀로 세파를 뚫고 나와 스스로 대중적 인지도를 이끌며 한 시대를 풍미한 여성 화가로 자리매김했다는 점에서 역사상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이 이번 서울미술관 전시에 붙인 글이다. 국립현대미술관과 천경자의 관계를 누구보다 잘 아는 김 실장이 이런 언급을 한 것은 우리 시대의 미술사가로서 객관을 지키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김 실장은 천경자가 그린 다수의 여성상이 ‘미인도’가 아니라 ‘초상화’라고 갈파했다. 남성의 미감을 만족시키는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자기감정에 충실한 독립적인 주체로서의 여성이라는 것이다. 작품을 보면 고개가 끄덕거려진다. ‘노천명’(1973), ‘자이르’(1974), ‘수녀 테레사’(1977), ‘길례 언니’(1982) 등. 운명을 적극적으로 다스린 인물들이다. 작가 자신의 감정을 짙게 담은 ‘고(孤)’(1974)도 생의 주인공으로서의 모습이다. 잭 라스무센 아메리칸대 미술관장이 그의 그림들을 본 후 “천경자는 무척 강인한 정신을 가졌고, 프리다 칼로보다 더 뛰어나다”고 한 것은 과언이 아니다.
이번 서울미술관 전시에는 여성 누드화 2점이 나왔는데, 그중 하나를 유심하게 봤다. (작품이라고 해도 누드를 찬찬히 보는 것은 민망하지만) 체모가 표현돼 있어서였다. ‘보리밭 누드 화가’ 이숙자의 전언에 의하면 천경자는 제자인 그에게 여성의 몸을 너무 적나라하게 그리지 말라며 체모를 빼기를 권했다. 실제로 천경자의 다른 누드화 ‘여인의 시 1·2’(서울시립미술관 소장)는 그런 그림 철학을 담고 있다. 생명 탄생의 모체로 인식할 수 있도록 몸을 상징화했다. 이번 전시에 등장한 누드화가 그 작품들과 달리 육체의 구체성으로 아름다움을 뽐내는 것은 연구 과제이다.
1958년 덕수궁에 나들이 간 천경자, 박경리, 한말숙.(왼쪽부터)
수필·기행문 등 20권 출간… 박경리 · 한말숙과 어울려■ 문단·화단 넘나든 천경자
일제 강점기에 한반도 남단 전남 고흥에서 태어난 여성 천경자. 그는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미술교사 김임년의 지도를 받으며 일본 유학을 꿈꾼다. 일본인 교사가 “조센진 여자 주제에…”라며 뺨을 때렸으나 그는 뜻을 꺾지 않았다. 17세에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 들어간 그는 본명 옥자(玉子) 대신 경자(鏡子)라는 이름을 썼다.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 되겠다는 다짐에서였다.
19세와 20세 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했다. 이때 동경제국대 유학생 이형식과 결혼하지만 1남 1녀를 낳고 헤어졌다. 24세 때 전남일보 기자 김남중과 사랑에 빠졌는데, 알고 보니 가정이 있는 남자였다. ‘연인’에게서 1남 1녀를 얻은 그는 이후 홀로 4명의 자녀를 부양했다.
1951년 27세 때 뱀 35마리가 우글거리는 그림 ‘생태’를 그려 화단에 충격을 줬다. 사랑했던 동생이 전쟁 속에 결핵을 앓다가 세상을 떠나자 그 비통함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는 생계를 위해 신문 소설 삽화, 잡지 표지화를 많이 그렸다. 당대의 문인들과 교우했는데, 특히 박경리·한말숙과 가까웠다. 그 자신이 수필가이기도 했다. 수필집과 세계풍물기행 등 20여 권의 책을 출간했는데, 상당수가 베스트셀러였다. (까까머리 고교생 때 전주의 헌책방에서 그의 수필집을 사서 밤새 읽었던 기억이 암암하다. 삶의 애환을 해학으로 녹여 낸 판소리 같은 글들이었다.)
그는 1969∼1994년 13차례 해외 스케치 여행에 나섰다. 유럽과 아프리카 대륙을 횡단했고, 인도에 이어 남미 아마존 밀림까지 누볐다. 우리가 최빈국이었던 시절부터 세계로 향했던 예술가의 자유 의지가 그의 색채 여행화에 담겨 있다.
그는 미인도 논란 이후 미국에 거주했는데, 1998년 일시 귀국해 서울시에 작품 93점을 기증했다. 자신이 세상을 떠나도 작품과 대중이 영원히 만났으면 하는 소망에서였다.
장재선 기자 기자 admin@slotnara.info
◇“요상한 그림이 사우나에 걸렸다”=1973년 서울 현대화랑에서 열린 전시회에 관람객이 길게 줄을 지어 입장을 기다렸다. 마지막 날엔 그 줄이 인사동을 지나 안국동까지 뻗었다. 전시회 작가는 천경자(千鏡子·1924∼2015). 큰 키에 하이힐, 이국적 마스크에 긴 생머리, 강렬한 색상의 옷차림으로 유명한 여성 화가였다. 일제 강점기 오션파라다이스다운로드 에 태어나 ‘여자 환쟁이’에 대한 편견을 뚫고 30세에 홍익대 미대 교수, 54세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된 인물이었다.
그런 작가의 삶은 67세가 되던 1991년 한 사건에 휘말리며 엄청나게 굴절됐다. 바로 ‘미인도’ 진위 논란이다. 이 사건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움직이는 미술관’ 전시를 하며 소장품의 복제 포스터를 판매한 데서 비롯됐다. 골드몽릴게임 천경자 이름을 단 복제화도 원작(29×26㎝)보다 큰 사이즈(44.5×40㎝)로 만들어 팔았다. 이 중 하나가 어느 건물 사우나에 걸려 있는 것을 천경자 지인이 보고 작가에게 “요상한 그림이 전시되고 있다”고 알렸다.
천경자는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인 원작을 본 후 “허깨비처럼 보이는 이런 작품을 내가 그린 적이 없다”고 했고, 이 주장이 릴게임바다이야기 언론에 보도되면서 예술계를 넘어선 사회 사건이 됐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위임을 받은 한국화랑협회는 3차에 걸친 감정을 통해 해당 작품을 진품으로 판정했다. 작가는 이 일에 실망을 표하며 미국으로 건너간 후 거기서 말년을 보냈다. “그 일만 생각하면 식도가 고통스럽습니다.” 천경자는 지인에게 보낸 엽서에 그렇게 썼다. 이 와중에 권춘식이라는 위작범이 등장해 바다이야기모바일 자신이 미인도를 그렸다고 했다가 수차례 말 바꾸기를 하며 흙탕물을 튀겼다.
작가 타계 후인 2016년 유족의 고소·고발에 따라 수사에 착수했던 검찰이 그 결과를 “진품으로 판단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작가를 잘 아는 평론가들과 유족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2025년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은 홈페이지 소장품 목록에서 천경자 작품 10개를 소개하 야마토게임연타 면서도 ‘미인도’는 뺐다. 현재형인 논란을 의식해서일 것이다.
위작 논란을 일으킨 ‘미인도’. 오른쪽 그림은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 스케치로 알려졌으나, 그의 차녀(김정희 미국 몽고메리대 교수)는 아니라고 부인했다.
◇“도대체 진실은 뭔가”= 양쪽 주장은 지금도 팽팽하다. 오광수·정준모, 김종근·최광진 등 당대 걸출한 평론가들이 각각 진품, 위작 쪽에 서서 방대한 증거를 제시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100분 토론’이 아니라 ‘100일 논쟁’으로도 끝나지 않을 듯싶다.
진품 쪽 주장의 가장 큰 핵심은 이 그림이 이미 1990년 1월 1일 발간된 ‘한국미술전집’ 한국화편 11권에 ‘나비와 여인’(1977년 작)이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는 것이다. 이 작품의 복제를 천 화백이 승인한 문서도 있다. 복제품이 커서 벙벙하게 느껴진 탓에 그가 착각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한국화랑협회 감정위원들이 수차례 진품으로 감정한 것, 검찰이 수사할 때 참고한 작품 출처와 석채 안료,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적외선 촬영 등도 유력한 증거다.
위작 쪽 주장의 핵심은 홍채와 입술 등을 표현하는 방식이 천 화백 풍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석채로 겹칠을 한 작가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미인도는 깊이가 현저하게 떨어진다. 프랑스 뤼미에르광학연구소 팀이 단층 촬영한 결과 진품 확률이 0.0002%라고 했던 것이 그걸 뒷받침한다. 무엇보다 “내 자식을 내가 몰라보겠느냐”고 한 작가의 말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천경자는 화상(畵商)의 간청에 못 이겨 그림을 팔고는 밤새 잠을 못 잤다며 다음 날 되돌려받는 일이 수차례 있을 정도로 작품을 분신처럼 사랑했다.
사안을 복잡하게 만든 또 다른 원인은 이 미인도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집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당시 신군부는 김재규 자택에서 압수한 물품 중 미인도 등을 국립현대미술관에 이관했다. 미술관은 1980년부터 이를 소장했는데, 복제품 판매를 계기로 사달이 난 것이었다.
이와 관련, 진품 주장 쪽에서는 “이른바 국사범(國事犯) 집에서 자신의 작품이 나온 것을 천 화백이 꺼림칙하게 여겼을 것”이라고 했고, 위작 쪽에선 “신군부가 김재규를 부정부패 인물로 만들기 위해 진품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로써 보면, 미스터리 영역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1991년 당시 국립현대미술관 쪽 주장에 가세했던 김창실 화랑협회장이 나중에 “신만이 아실 것”이라고 했던 것은 솔직한 고백이었다.
천 화백 10주기 특별전(서울미술관)에 나온 누드화.
◇‘슬픈 전설’의 찬란함=‘찬란한 전설 천경자’(A Splendid Legend Chun Kyung-Ja). 100여 년 전통의 이탈리아 명문 출판사 스키라(SKIRA)가 곧 발간하는 도록 제목이다.
천경자는 한국 현대미술사를 자신의 빛으로 밝힌 거장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예우는 미흡했다. 1983년 은관문화훈장을 수여했던 정부가 그의 사후에 금관훈장을 추서하지 않은 것이 대표적이다. 국립예술기관과 맞서며 미인도 논란을 일으켰다는 원죄에 그를 가둔 것이다.
“이제 진위 논란을 넘어 작가의 예술혼을 기려야 할 때다. 대중이 그의 작품 세계를 제대로 즐길 수 있도록 하자.”
민간 뮤지엄인 석파정 서울미술관이 특별전 ‘내 슬픈 전설의 101페이지’(2025.9.24∼2026.1.25)를 마련한 취지다. 이 전시는 천경자 타계 10주기를 기리는 동시에 탄생 101주년을 재조명 원년으로 삼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이 전시에 나온 작품 84점을 보다가 예기치 않게 목울대가 뜨거워졌다. 자신의 삶을 슬픈 전설이라고 한 예술가의 고투와 자존이 오롯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식민지 여성으로 태어나 차별과 싸우고, 이혼녀라는 손가락질을 견디며 전쟁과 가난 속에서 2남 2녀를 홀로 키워야 했던 시간들. 예술 세계를 이토록 돌올하게 가꾸기까지 그 한(恨)이 얼마나 깊었을 것인가.
서울미술관 대표 안진우는 “각 기관·단체와 개인 소장 등으로 흩어져 있는 작품들과 자료를 모으는 과정이 너무 힘들어서 몇 번이나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그 눈물의 결과로 슬픈 전설을 오늘 여기에 찬란히 드러냈으니 그 보람을 한껏 느껴도 좋겠다. 천상의 작가도 미쁘게 여길 것이다.
◇‘미인도’가 아니라 ‘여성 초상화’=천경자는 수묵화에 비해 천대받던 전통 채색화에 현대성을 부여한 작가다. 자전적 세계를 초현실주의적 분위기로 표현해 새로운 미학의 길을 열었다.
첫 여성 서양화 작가인 나혜석보다 28년 늦게 태어난 그는 남성에게 의지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사회적 성공을 이뤄 냈다. “오롯이 자신의 힘으로, 홀로 세파를 뚫고 나와 스스로 대중적 인지도를 이끌며 한 시대를 풍미한 여성 화가로 자리매김했다는 점에서 역사상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이 이번 서울미술관 전시에 붙인 글이다. 국립현대미술관과 천경자의 관계를 누구보다 잘 아는 김 실장이 이런 언급을 한 것은 우리 시대의 미술사가로서 객관을 지키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김 실장은 천경자가 그린 다수의 여성상이 ‘미인도’가 아니라 ‘초상화’라고 갈파했다. 남성의 미감을 만족시키는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자기감정에 충실한 독립적인 주체로서의 여성이라는 것이다. 작품을 보면 고개가 끄덕거려진다. ‘노천명’(1973), ‘자이르’(1974), ‘수녀 테레사’(1977), ‘길례 언니’(1982) 등. 운명을 적극적으로 다스린 인물들이다. 작가 자신의 감정을 짙게 담은 ‘고(孤)’(1974)도 생의 주인공으로서의 모습이다. 잭 라스무센 아메리칸대 미술관장이 그의 그림들을 본 후 “천경자는 무척 강인한 정신을 가졌고, 프리다 칼로보다 더 뛰어나다”고 한 것은 과언이 아니다.
이번 서울미술관 전시에는 여성 누드화 2점이 나왔는데, 그중 하나를 유심하게 봤다. (작품이라고 해도 누드를 찬찬히 보는 것은 민망하지만) 체모가 표현돼 있어서였다. ‘보리밭 누드 화가’ 이숙자의 전언에 의하면 천경자는 제자인 그에게 여성의 몸을 너무 적나라하게 그리지 말라며 체모를 빼기를 권했다. 실제로 천경자의 다른 누드화 ‘여인의 시 1·2’(서울시립미술관 소장)는 그런 그림 철학을 담고 있다. 생명 탄생의 모체로 인식할 수 있도록 몸을 상징화했다. 이번 전시에 등장한 누드화가 그 작품들과 달리 육체의 구체성으로 아름다움을 뽐내는 것은 연구 과제이다.
1958년 덕수궁에 나들이 간 천경자, 박경리, 한말숙.(왼쪽부터)
수필·기행문 등 20권 출간… 박경리 · 한말숙과 어울려■ 문단·화단 넘나든 천경자
일제 강점기에 한반도 남단 전남 고흥에서 태어난 여성 천경자. 그는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미술교사 김임년의 지도를 받으며 일본 유학을 꿈꾼다. 일본인 교사가 “조센진 여자 주제에…”라며 뺨을 때렸으나 그는 뜻을 꺾지 않았다. 17세에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 들어간 그는 본명 옥자(玉子) 대신 경자(鏡子)라는 이름을 썼다.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 되겠다는 다짐에서였다.
19세와 20세 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했다. 이때 동경제국대 유학생 이형식과 결혼하지만 1남 1녀를 낳고 헤어졌다. 24세 때 전남일보 기자 김남중과 사랑에 빠졌는데, 알고 보니 가정이 있는 남자였다. ‘연인’에게서 1남 1녀를 얻은 그는 이후 홀로 4명의 자녀를 부양했다.
1951년 27세 때 뱀 35마리가 우글거리는 그림 ‘생태’를 그려 화단에 충격을 줬다. 사랑했던 동생이 전쟁 속에 결핵을 앓다가 세상을 떠나자 그 비통함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는 생계를 위해 신문 소설 삽화, 잡지 표지화를 많이 그렸다. 당대의 문인들과 교우했는데, 특히 박경리·한말숙과 가까웠다. 그 자신이 수필가이기도 했다. 수필집과 세계풍물기행 등 20여 권의 책을 출간했는데, 상당수가 베스트셀러였다. (까까머리 고교생 때 전주의 헌책방에서 그의 수필집을 사서 밤새 읽었던 기억이 암암하다. 삶의 애환을 해학으로 녹여 낸 판소리 같은 글들이었다.)
그는 1969∼1994년 13차례 해외 스케치 여행에 나섰다. 유럽과 아프리카 대륙을 횡단했고, 인도에 이어 남미 아마존 밀림까지 누볐다. 우리가 최빈국이었던 시절부터 세계로 향했던 예술가의 자유 의지가 그의 색채 여행화에 담겨 있다.
그는 미인도 논란 이후 미국에 거주했는데, 1998년 일시 귀국해 서울시에 작품 93점을 기증했다. 자신이 세상을 떠나도 작품과 대중이 영원히 만났으면 하는 소망에서였다.
장재선 기자 기자 admin@slotnara.inf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