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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지금 먼저 마음에 하고 와 은서울 대학로에 있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예술기록원 본원에서 지난 9일 개막한 ‘원 테이블5: 임성남, 바레-에서 발레로’ 전시에서 선보이는 임성남의 젊은 시절 모습. 1950년대 임성남이 출연한 발레 ‘장미의 정’(왼쪽)과 ‘백조의 호수’에 출연한 모습.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예술기록원 제공
“지금 봐도 임성남 선생님의 다리는 100만 불짜리야.”
“임성남 선생님의 생전 목소리를 들으니 옛날 생각이 나네.”
지난 11일 서울 대학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예술기록원 본원 열람실. 김명순(1973년 입단), 릴게임모바일 김긍수(1982년), 김순정(1983년), 박희태(1984년) 등 60~70대의 전직 국립발레단 단원들은 전날 개막한 전시 ‘원 테이블5: 임성남, 바레-에서 발레로’(포스터)를 둘러보며 그리움과 반가움이 뒤섞인 탄성을 쏟아냈다. 오랫동안 대학 강단에서 섰다가 은퇴한 이들은 국립발레단에서 무용수로 활동하던 시절을 하나둘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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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남 유족, 지난 2010년 아르코에 자료 기탁
아르코예술기록원은 1979년 개관한 국내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예술자료 전문 보존기관이다. 한국 근현대 예술사의 흐름을 살 바다이야기합법 펴볼 수 있는 자료를 체계적으로 수집·보존해 창작과 연구, 교육에 활용될 수 있도록 제공하고 있다. 기록원은 지난해부터 주제를 정해 소장 기록물을 열람실 공간에 소규모 전시 코너로 선보이는 기획 ‘원 테이블’(One Table)을 운영하고 있다. ‘원 테이블’의 다섯 번째 주인공은 1962년부터 국립발레단을 30년간 이끈 ‘한국 발레의 아버지’ 임성남(19 바다이야기APK 29~2002, 본명 임영규)이다. 이번 전시는 2010년 임성남 전 국립발레단장의 유족이 기탁한 자료의 정리 작업이 올해 마무리된 데 맞춰 기획됐다. ‘무용가 임성남 컬렉션’에 포함된 2700여 건의 자료 가운데 선별된 기록과 영상, 녹음 자료 등이 공개됐다.
이날 전시에는 임성남의 부인 김행옥(90) 여사와 임성남 바다이야기모바일 평전 ‘하늘 높이 춤추며 : 한국발레의 선구자 임성남 발레 60년’을 쓴 무용평론가 장광열도 함께했다. 김 여사는 “평생 한국 발레를 위해 헌신한 남편의 삶이 후대에도 기억되길 바란다”면서 “자료를 기탁한 뒤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정리가 되지 않아 아주 속상했는데 마침내 이렇게 볼 수 있어서 정말 기쁘다. 연구자를 비롯해 많은 분이 ‘무용가 임성남 컬렉션’의 자료를 활용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임성남 초대 국립발레단장의 부인 김행옥 여사가 지난 11일 ‘원 테이블5: 임성남, 바레-에서 발레로’ 전시장에서 벽에 걸린 대형 포스터를 어루만지고 있다. 최현규 기자
한국 최초 직업발레단 서울발레단 입단
평전 ‘하늘 높이 춤추며’에 따르면 임성남은 전주사범학교에 입학한 후 지휘자와 작곡가를 꿈꿨다. 그러나 아버지의 반대로 피아노를 처분하면서 음악의 길을 접어야 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프랑스 발레 영화 ‘백조의 죽음’을 보고 발레에 매혹됐다. 열여섯 살이었던 그는 아버지 몰래 상경해 서울발레단(당시 표기는 서울바레-단)을 찾아가 방학마다 발레를 배우기 시작했다. 서울발레단은 일본에서 발레를 배우고 돌아온 한동인이 1946년 정지수, 장추화 등 단원 10여 명과 함께 창단한 한국 최초의 직업발레단이다. 김행옥 여사는 “지금이야 발레를 배우기 좋은 환경이지만, 당시에는 남대문시장에서 미군 내복을 사다 검은색으로 염색한 뒤 다시 바느질해서 타이츠를 만들 만큼 열악했다”고 회고했다.
전주사범학교를 졸업한 임성남은 부속학교 음악교사로 부임했지만 석 달 만에 직장을 그만뒀다. 발레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다. 아버지로부터 매타작을 당했지만, 그는 다시 상경해 정식으로 서울발레단에 입단했다. 그리고 1950년 6월 24일 서울발레단의 ‘인어공주’에 출연하며 발레리노로 정식 데뷔했다. 하지만 이튿날 6·25 전쟁이 발발했고, 한동인은 일부 단원들과 함께 납북됐다.
임성남은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지인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1951년 일본고등음악학교 피아노과에 입학한 그는 하토리-시마다 발레단의 로맨틱 발레 ‘레 실피드’를 보고 다시 한번 발레의 매력에 빠졌다. 미군 부대에서 자동차 운전으로 생계를 꾸리며 하토리-시마다 발레단 연구소에서 수업을 받았다.
일본 하토리-시마다 발레단에서 활동
하토리 치에코와 시마다 히로시(한국명 백성규)는 ‘일본 발레의 어머니’로 불리는 엘리아나 파블로바의 제자들이다. 연구소에서 성실히 훈련하던 임성남은 스승의 눈에 들어 개인 지도를 따로 받으며 빠르게 기량을 쌓았다. 1년 만에 정식 단원이 된 그는 여러 작품에 출연했고, 1953년 말 또래 무용수들과 ‘도쿄청년발레그룹’을 창단했다. 이듬해 2월 창단 공연에서 ‘백조의 호수’ 2막의 지그프리트 왕자로 무대에 섰다.
그가 일본에서 얼마나 힘들고 치열하게 살았는지는 이번 전시에서 공개된 당시 일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일기에는 발레에 대한 열망과 장남으로서 가족과 떨어져 있는 현실 사이에서의 고뇌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결국 향수가 심해진 그는 귀국을 결심했다.
귀국 이후 한국 발레의 기반 다져
가족을 만나고 일본에 돌아가려던 생각은 귀국 이후 한국에서 발레를 발전시켜야겠다는 사명감으로 바뀌었다. 당시 한국에서 발레를 체계적으로 배운 이는 임성남이 유일했다. 자신의 이름을 딴 발레연구소를 설립한 그는 연구생을 길러 ‘백조의 호수’ 2막을 공연하며 본격적으로 선구자의 길에 들어섰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다양한 무용 관련 활동에 참여하는 등 발레의 기반을 다지는 데 주력했다. 국내에서 토슈즈가 제작되기 시작한 것도 그의 노력 덕분이다. 김행옥 여사는 “한국에선 토슈즈를 제대로 만드는 곳이 없었기 때문에, 남편이 일본에서 수십 켤레를 사 와 국내 제화업자에게 일일이 해부해 보여주며 제작을 부탁했다”는 일화도 소개했다.
임성남은 1964년 서울예고와 예원학교에서 무용과장을 맡아 제도권에서 본격적으로 발레 전공자 양성에 나섰다. 김순정 성신여대 교수는 “현재 한국 발레는 사실상 임성남 선생님의 제자들로 이어졌다. 나는 예원학교에 입학하면서 선생님께 본격적으로 배웠다”면서 “임 선생님은 평생 제자 육성에 헌신하신 분”이라고 말했다.
1962년부터 30년간 국립발레단장 역임
국립극장이 1962년 6개 전속단체와 함께 설립되면서 임성남은 33세의 젊은 나이에 국립무용단 단장이 됐다. 당시 한국무용과 발레를 포함한 국립무용단은 임성남을 비롯해 13명의 단원으로 구성됐다. 하지만 직업무용단이면서도 예산 부족으로 연 2회 정기공연이 보장됐을 뿐 급여조차 없었다. 발레 부문 단원들이 다양한 이유로 그만두면서 임성남은 자신의 발레단에서 제자들과 함께 발레 공연을 올렸다.
1973년 국립발레단과 국립무용단의 공식 분리가 이뤄진 뒤 임성남은 재창단된 국립발레단의 단장을 다시 맡았다. 41명의 단원으로 시작한 국립발레단은 많지 않아도 월급이 나왔고 전용 연습실도 갖춰 제대로 된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이날 전시실을 둘러보던 초로의 단원들은 연습실에서 호랑이 같던 스승을 떠올렸다. 김긍수 전 국립발레단장은 “전시품 가운데 녹음기가 여러 대 있는데, 임 선생님이 전막 연습할 때 단원들이 틀리는 부분에 맞춰 지적 사항을 녹음했던 용도”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임 선생님은 연습실 밖에서는 농담을 많이 하시는 등 재밌으셨다”고 부연했다.
탄생 100주년 맞춰 국립발레단도 기념작업 준비
임성남은 오랫동안 무용수로 무대에 서는 한편 안무가로서 1960년대엔 ‘지귀의 꿈’ ‘처용’ 등 한국적 창작 발레를 개척했다. 1970년대 이후엔 ‘지젤’ ‘백조의 호수’ ‘코펠리아’ 등 클래식 발레 전막 공연을 한국에서 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직접 재안무를 하는가 하면 해외 안무가들을 초청해 국제적 수준의 레퍼토리를 늘리며 국립발레단을 이끌었다.
이번 전시는 임성남의 삶이 한국 발레사와 맞닿아 있는 것을 보여준다. 임성남의 기록 속에는 새로운 예술인 발레를 받아들이고 제도화해 나간 한국 발레사의 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장광열은 “‘무용가 임성남 컬렉션’ 공개를 계기로 임 선생님에 관한 연구가 좀 더 이뤄져야 한다. 아직 한국 발레사의 초창기를 비롯해 밝혀야 할 것이 많다”고 지적했다. 다행히 지난 2022년 창단 60주년을 맞아 아카이브 자료 사업을 시작한 국립발레단은 임성남의 탄생 100주년인 2029년까지 연구 등 기념 작업에 나설 예정이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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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봐도 임성남 선생님의 다리는 100만 불짜리야.”
“임성남 선생님의 생전 목소리를 들으니 옛날 생각이 나네.”
지난 11일 서울 대학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예술기록원 본원 열람실. 김명순(1973년 입단), 릴게임모바일 김긍수(1982년), 김순정(1983년), 박희태(1984년) 등 60~70대의 전직 국립발레단 단원들은 전날 개막한 전시 ‘원 테이블5: 임성남, 바레-에서 발레로’(포스터)를 둘러보며 그리움과 반가움이 뒤섞인 탄성을 쏟아냈다. 오랫동안 대학 강단에서 섰다가 은퇴한 이들은 국립발레단에서 무용수로 활동하던 시절을 하나둘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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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남 유족, 지난 2010년 아르코에 자료 기탁
아르코예술기록원은 1979년 개관한 국내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예술자료 전문 보존기관이다. 한국 근현대 예술사의 흐름을 살 바다이야기합법 펴볼 수 있는 자료를 체계적으로 수집·보존해 창작과 연구, 교육에 활용될 수 있도록 제공하고 있다. 기록원은 지난해부터 주제를 정해 소장 기록물을 열람실 공간에 소규모 전시 코너로 선보이는 기획 ‘원 테이블’(One Table)을 운영하고 있다. ‘원 테이블’의 다섯 번째 주인공은 1962년부터 국립발레단을 30년간 이끈 ‘한국 발레의 아버지’ 임성남(19 바다이야기APK 29~2002, 본명 임영규)이다. 이번 전시는 2010년 임성남 전 국립발레단장의 유족이 기탁한 자료의 정리 작업이 올해 마무리된 데 맞춰 기획됐다. ‘무용가 임성남 컬렉션’에 포함된 2700여 건의 자료 가운데 선별된 기록과 영상, 녹음 자료 등이 공개됐다.
이날 전시에는 임성남의 부인 김행옥(90) 여사와 임성남 바다이야기모바일 평전 ‘하늘 높이 춤추며 : 한국발레의 선구자 임성남 발레 60년’을 쓴 무용평론가 장광열도 함께했다. 김 여사는 “평생 한국 발레를 위해 헌신한 남편의 삶이 후대에도 기억되길 바란다”면서 “자료를 기탁한 뒤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정리가 되지 않아 아주 속상했는데 마침내 이렇게 볼 수 있어서 정말 기쁘다. 연구자를 비롯해 많은 분이 ‘무용가 임성남 컬렉션’의 자료를 활용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임성남 초대 국립발레단장의 부인 김행옥 여사가 지난 11일 ‘원 테이블5: 임성남, 바레-에서 발레로’ 전시장에서 벽에 걸린 대형 포스터를 어루만지고 있다. 최현규 기자
한국 최초 직업발레단 서울발레단 입단
평전 ‘하늘 높이 춤추며’에 따르면 임성남은 전주사범학교에 입학한 후 지휘자와 작곡가를 꿈꿨다. 그러나 아버지의 반대로 피아노를 처분하면서 음악의 길을 접어야 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프랑스 발레 영화 ‘백조의 죽음’을 보고 발레에 매혹됐다. 열여섯 살이었던 그는 아버지 몰래 상경해 서울발레단(당시 표기는 서울바레-단)을 찾아가 방학마다 발레를 배우기 시작했다. 서울발레단은 일본에서 발레를 배우고 돌아온 한동인이 1946년 정지수, 장추화 등 단원 10여 명과 함께 창단한 한국 최초의 직업발레단이다. 김행옥 여사는 “지금이야 발레를 배우기 좋은 환경이지만, 당시에는 남대문시장에서 미군 내복을 사다 검은색으로 염색한 뒤 다시 바느질해서 타이츠를 만들 만큼 열악했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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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남은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지인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1951년 일본고등음악학교 피아노과에 입학한 그는 하토리-시마다 발레단의 로맨틱 발레 ‘레 실피드’를 보고 다시 한번 발레의 매력에 빠졌다. 미군 부대에서 자동차 운전으로 생계를 꾸리며 하토리-시마다 발레단 연구소에서 수업을 받았다.
일본 하토리-시마다 발레단에서 활동
하토리 치에코와 시마다 히로시(한국명 백성규)는 ‘일본 발레의 어머니’로 불리는 엘리아나 파블로바의 제자들이다. 연구소에서 성실히 훈련하던 임성남은 스승의 눈에 들어 개인 지도를 따로 받으며 빠르게 기량을 쌓았다. 1년 만에 정식 단원이 된 그는 여러 작품에 출연했고, 1953년 말 또래 무용수들과 ‘도쿄청년발레그룹’을 창단했다. 이듬해 2월 창단 공연에서 ‘백조의 호수’ 2막의 지그프리트 왕자로 무대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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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만나고 일본에 돌아가려던 생각은 귀국 이후 한국에서 발레를 발전시켜야겠다는 사명감으로 바뀌었다. 당시 한국에서 발레를 체계적으로 배운 이는 임성남이 유일했다. 자신의 이름을 딴 발레연구소를 설립한 그는 연구생을 길러 ‘백조의 호수’ 2막을 공연하며 본격적으로 선구자의 길에 들어섰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다양한 무용 관련 활동에 참여하는 등 발레의 기반을 다지는 데 주력했다. 국내에서 토슈즈가 제작되기 시작한 것도 그의 노력 덕분이다. 김행옥 여사는 “한국에선 토슈즈를 제대로 만드는 곳이 없었기 때문에, 남편이 일본에서 수십 켤레를 사 와 국내 제화업자에게 일일이 해부해 보여주며 제작을 부탁했다”는 일화도 소개했다.
임성남은 1964년 서울예고와 예원학교에서 무용과장을 맡아 제도권에서 본격적으로 발레 전공자 양성에 나섰다. 김순정 성신여대 교수는 “현재 한국 발레는 사실상 임성남 선생님의 제자들로 이어졌다. 나는 예원학교에 입학하면서 선생님께 본격적으로 배웠다”면서 “임 선생님은 평생 제자 육성에 헌신하신 분”이라고 말했다.
1962년부터 30년간 국립발레단장 역임
국립극장이 1962년 6개 전속단체와 함께 설립되면서 임성남은 33세의 젊은 나이에 국립무용단 단장이 됐다. 당시 한국무용과 발레를 포함한 국립무용단은 임성남을 비롯해 13명의 단원으로 구성됐다. 하지만 직업무용단이면서도 예산 부족으로 연 2회 정기공연이 보장됐을 뿐 급여조차 없었다. 발레 부문 단원들이 다양한 이유로 그만두면서 임성남은 자신의 발레단에서 제자들과 함께 발레 공연을 올렸다.
1973년 국립발레단과 국립무용단의 공식 분리가 이뤄진 뒤 임성남은 재창단된 국립발레단의 단장을 다시 맡았다. 41명의 단원으로 시작한 국립발레단은 많지 않아도 월급이 나왔고 전용 연습실도 갖춰 제대로 된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이날 전시실을 둘러보던 초로의 단원들은 연습실에서 호랑이 같던 스승을 떠올렸다. 김긍수 전 국립발레단장은 “전시품 가운데 녹음기가 여러 대 있는데, 임 선생님이 전막 연습할 때 단원들이 틀리는 부분에 맞춰 지적 사항을 녹음했던 용도”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임 선생님은 연습실 밖에서는 농담을 많이 하시는 등 재밌으셨다”고 부연했다.
탄생 100주년 맞춰 국립발레단도 기념작업 준비
임성남은 오랫동안 무용수로 무대에 서는 한편 안무가로서 1960년대엔 ‘지귀의 꿈’ ‘처용’ 등 한국적 창작 발레를 개척했다. 1970년대 이후엔 ‘지젤’ ‘백조의 호수’ ‘코펠리아’ 등 클래식 발레 전막 공연을 한국에서 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직접 재안무를 하는가 하면 해외 안무가들을 초청해 국제적 수준의 레퍼토리를 늘리며 국립발레단을 이끌었다.
이번 전시는 임성남의 삶이 한국 발레사와 맞닿아 있는 것을 보여준다. 임성남의 기록 속에는 새로운 예술인 발레를 받아들이고 제도화해 나간 한국 발레사의 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장광열은 “‘무용가 임성남 컬렉션’ 공개를 계기로 임 선생님에 관한 연구가 좀 더 이뤄져야 한다. 아직 한국 발레사의 초창기를 비롯해 밝혀야 할 것이 많다”고 지적했다. 다행히 지난 2022년 창단 60주년을 맞아 아카이브 자료 사업을 시작한 국립발레단은 임성남의 탄생 100주년인 2029년까지 연구 등 기념 작업에 나설 예정이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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