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티스 에이씨텍

[休-별이 쏟아지는 고장 충주]나랑 별 보러 가지 않을래?

석굴암 복원 모델로 인용된 미륵대원지절터에 남은 석조귀부서 천문관측 추측겨울철 별 쏟아져···'사진 맛집' 유명세강물 위에 우뚝 서 있는 수주팔봉 일대절경에 흠뻑···캠핑족 몰리는 '차박 맛집'수주팔봉은 글자 그대로 ‘물위에 우뚝 서 있는 여덟 개의 봉우리’라는 뜻이다. 달천변을 따라 서 있는 봉우리의 이름은 송곳바위·중바위·칼바위 등 여덟 개. 가장 높은 칼바위라고 해봤자 493m에 불과하지만 지대가 낮은 물가에서 솟아올라 그 위용이 대단하다. /사진 제공=충주시청[서울경제] 여행은 경관을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야기를 듣는 것도 소홀히 할 수 없다. 그렇게 놓고 보면 충주는 수려한 풍광에 풍부한 이야기가 곳곳에 깃든 여행지다. 독일의 로렐라이 언덕처럼 황량한 곳도 전설 하나와 가곡 하나로 전 세계 여행객의 발길을 잡는 판에 충주는 최소한 수백 년은 관광객들을 불러 모을 수 있는 곳이다.충주에서 먼저 가 본 곳은 수주팔봉이다. 수주팔봉은 글자 그대로 ‘물위에 우뚝 서 있는 여덟 개의 봉우리’라는 뜻이다. 달천변을 따라 서 있는 봉우리 이름은 송곳바위·중바위·칼바위 등 여덟 개. 가장 높은 칼바위라고 해봤자 493m에 불과하지만 지대가 낮은 물가에서 솟아올라 그 위용이 대단하다.이 일대는 취수원인 한강 상류 지역이라 일절 취사나 야영이 불가능하지만 팔봉교 아래 일부 구간이 개방돼 수주팔봉을 바라보며 캠핑을 즐길 수 있다. 최근 입소문이 나면서 차박의 성지로 꼽히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달천을 조망하는 경치가 압권인데다 수심이 낮고 다슬기·피라미 등 민물고기가 많아 천렵을 즐길 수도 있다.달천이라는 이름은 수달이 서식한다는 의미에서 수달 ‘달’자를 써 ‘달강(獺江)’, 혹은 물맛이 달아 ‘감천(甘川)’으로 불렸다는 설이 있다. 어쨌거나 물이 맑은 달천은 올갱이가 지천이고 중·상류는 천연기념물이자 멸종 위기 야생동물인 수달 서식지로 알려져 있다. 근처 곳곳에는 올갱이해장국집도 있어 충주의 별미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다.미륵대원지의 석조귀부와 가림막에 가려진 석불입상은 각각 진북(眞北)과 자북(磁北)을 가리키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천문연구원 김효령 박사는 이곳에 천문 연구 기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충주의 이야깃거리라면 미륵대원지를 빼놓을 수 없다. 충주 미륵대원지는 고려시대 석실 사원지로 알려져 있어 지난 1965년 경주 석굴암을 복원할 당시 참고 자료로 인용되기도 했다. 오층석탑과 석불입상은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95호와 제96호로 지정됐는데 석불입상은 현재 보수 때문에 가림막을 쳐 놓아 살펴볼 수 없었다.충주 미륵대원지가 눈길을 끄는 것은 석조와 목구조를 합성한 석굴사원 터로 석굴을 금당으로 삼은 북향의 특이한 형식 때문이다. 현재 석실 상부의 목구조는 남아 있지 않으나 석실 구조물 중앙에는 주존불인 미륵여래가 봉안돼 있으며 1977년 발굴에 의해 전실(前室)에 해당되는 구역에서 초석(礎石)이 발견돼 평면의 구조를 알 수 있게 됐다.이 절이 북향으로 지어진 것과 관련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신라가 망해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에 누이 덕주공주가 지은 월악산 덕주사를 바라보도록 북쪽을 향해 지었다고 한다.반면 절터에 남아 있는 석조귀부(石造龜趺)가 천문 관측 용도로 사용됐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 주장을 개진한 이는 한국천문연구원 김효령 박사로 그의 주장에 따르면 거북 모양의 귀부는 북극성이 있는 진북(眞北)을 가리키고 있고 뒤에 있는 석등과 석불입상은 나침반 N극이 가리키는 자북(磁北)을 향한다. 그 차이는 6도로 현대 과학이 밝혀낸 진북과 자북의 차이를 정밀하게 재현하고 있다는 것이다.이에 대해 지리산 인근에서 태어났다는 주지 성덕스님은 “나도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며 “아닌 게 아니라 지리산 자락이 고향인 나도 이렇게 별이 쏟아지듯 보이는 곳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스님은 “별들이 잘 보이는 겨울철에는 별을 촬영하는 사진작가들이 많이 찾는다”며 기자를 이끌고 석조귀부 뒤로 안내했다. 스님이 거북상 꼬리 부분에서 보여 준 것은 돌을 파내 만든 점 7개. 성덕스님은 “절에서는 이 점들을 옛날부터 북두칠성이라고 불렀다”고 전했다.충주 고구려비는 고등학교 교과서에 장수왕이 세운 것이라고 게재돼 있지만 최근 들어서는 21대 문자왕이 세웠다는 설이 힘을 받고 있다.충주의 문화동호인들이 1979년 발견한 고구려비는 이 지역의 또 다른 이야깃거리다. 마을 주민들이 옛날부터 신성시해 이 앞에서 고사를 지내기도 했는데 오랫동안 신라비로 여겨지던 이 비가 고구려비로 밝혀진 것이다. 국보 205호인 이 비는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고구려비로 역사적 가치가 적지 않다.교과서에는 이 비를 세운 이가 장수왕이라고 쓰여 있지만 최근 들어서는 21대 문자왕이 세웠다는 설이 힘을 받고 있다. 이상기 중심고을연구원 원장(문학박사)은 “비석에 새겨진 조(祖)자를 서로 상(相)자로 잘못 해석하면서 비롯된 오류로 보인다”며 “오히려 문자왕이 할아버지인 장수왕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문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말했다. /글·사진(충주)=우현석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