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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없어도 할 말은 자꾸 생긴다 원고 요청을 받았는데 글이 너무 안 써져 죽고 싶다.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엘르〉 10월호 엘르보이스 원고 말이다. 예술과 창작의 원천은 언제나 약간의 결핍과 상처인데 요즘 배부른 돼지처럼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탓이 크다. 나의 적들이 가장 이를 갈며 분해할 바로 그 ‘별일 없는’ 상태. 어쩌다 보니 계속 해외 일정이 잡혀 한 달에 한 번꼴로 미국, 네덜란드, 호주를 1주일씩 태평하게 돌아다녔다. 새로운 자격증을 따는 과정이 좀 지리멸렬했지만 그 핑계로 본업인 체육관 수업을 많이 줄였고, 오랜만에 엉덩이 붙이고 앉아 공부하면서 학생이라는 신분이 상전이라고 느꼈다. 간만에 펜을 잡고 시험에주식평균수익률
대비하는 공부는 꽤 흥미진진했다. 6년 전, 평범한 사무직에서 체육관 오너로 진로를 급 변경할 때 이제야 재능 있는 분야를 찾았다고 쾌재를 외쳤는데, 이제 와서 ‘아 역시 나는 공부가 더 적성에 맞나 봐’라는 생각을 잠시 해보기도.
그나저나 이번 호 주제는 가을이다. 뭔가 쓸쓸한 감성을 얹어야 할 것 같은데…. 도무지 조금도 쓸쓸하지 황금성릴
않다. 오히려 어릴 땐, 그러니까 30대 초중반까지는 가을을 꽤 타서 항상 11월 즈음에 여러 가지 사고를 치고 다녔다. 사고의 대부분은 좋게 말해 사랑과 애정, 솔직히 말하면 스킨십 관련 이슈였다. 만나면 안 되는 사람 만나고 그러면 안 되는 사람이랑 그러고 뭐 그런 거. 요새는 잠깐 심장이 간질간질하고 들뜬다 싶다 가도 금방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감쪽같이증권정보지
지나간다. 마치 가짜 식욕처럼 꾹 참으면 된다. 이걸 나이 먹고 호르몬이 안정화된 덕이라고 봐야 하는지 아니면 나이 탓이라고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평화’는 편안하고 어쩔 수 없이 약간 지루하기도 하다. 그나마 뭔가 사건이 일어날 낌새라면 ‘나 너무 별일 없다’고 세상에 떠벌리거나 ‘오늘은 손님이 안 오네’라고 입방정을 떨자마자 사람들이 밀어닥쳐 북새통실시간주식시세
이 되는 알바의 징크스처럼, 별일 없다고 자부하면 꼭 별일이 생기긴 하더라.
뻘소리로 벌써 분량의 반을 채웠다. 담당 에디터가 배신의 눈물을 흘리기 전에 진짜 주제에 집중해 보자. 가을이라…. 한국 나이로 마흔 줄에 접어들면서 인생의 가을로 접어드는 시점이 아닌가 감히 생각해 본다. 대충 평균 기대수명인 80세까지 산다고 상정했을 때 8GOODIHTS
0년을 4등분을 해서 20년씩을 한 계절이라 치면 이제 봄과 여름이 막 지나는 늦여름과 초가을 사이. 타협을 모르고 불타오르던 햇볕이 은근히 누그러지고 열이 올라 뒤척이던 밤들은 마지막이 언제였는지 가물가물하다. 그나마 선선한 바람에 비로소 숨통이 트인다. 가을은 봄만큼이나 완벽하다. 절대 못 입는 옷도 없고 절대 못하는 일도 없는 계절. 하고 싶은 대부분의 것을 허용하는 인자한 온도와 습도. 유일한 단점은 이 완벽한 날들이 너무나 짧다는 것. 똑같이 찰나지만 봄이 멋모르고 하는 첫사랑이라면 가을은 상대와 상황을 생각할 줄 알아서 조용히 속으로만 삭이는 어른의 마음이랄까. 그러니까, 더 운치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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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모든 좋은 것들은 수명이 짧다. 아니, 오래 존재하지 않는 것들은 귀하기 때문에 더 아련하게 아로새겨진다. 이건 닭과 계란 중 누가 먼저냐는 이슈보다 꽤 확실한 편이라고 생각한다. 명제를 선행하는 건 찬란보다 찰나. 〈타이타닉〉에서 잭이 살아남아 로즈와 결혼했다면 둘은 사십도 되기 전에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에이프릴과 프랭크가 되어 〈사랑과 전쟁〉이나 〈이혼숙려캠프〉에 출연했을 것이다. 나의 선선한 가을 역시 얼마나 짧을지 가늠이 되지 않아 두렵다. 언제까지 ‘그 나이로 안 보이세요’ 수준의 적당한 젊음과 ‘그럴 수도 있지’로 뭉갤 수 있는 성숙함이 공존하는 꽤 괜찮은 인간의 흉내를 유지할 수 있을까. 지금은 청년과 중년의 경계에서 길고 통 넓은 바지 밑으로 남몰래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를 하는 기분이다. 누군가 얼핏 봤을 때는 딱 적절한 지점에서 양쪽의 장점만 취한 이상적인 상태로 보일지도 모른다. 언제 삽시간에 칼바람이 불고 수도가 얼어붙는 겨울이 밀어닥칠지. 나는 가을의 끝을, 겨울의 시작점을 스스로 알아차릴 수 있을까. 나도 모르는 동안 겪어보지 못한 어린 세대의 새로운 모든 것에 부정적인 늙다리가 될까 봐 두렵다.
가을은 늘 그런 계절이다. 모든 것이 천국 같던 봄을 순식간에 빼앗긴 기억이 있기에 가장 좋은 날에도 끝을 예감한다. 그래서 점점 더 선명해지는 풍경과 서러움. 어떻게 이 짧은 시간이 일 년 중 가장 풍요로울 수 있는 건지. 가을은 냉정한 결말이 예고된 대신 그간의 비바람과 땡볕에 시달린 수고의 결과로 얼마간의 수확을 거둘 수 있게 한다. 조금이나마 진심으로 남과 무언가를 나누고 그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 고생했다, 나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시기. 그래서 여름에 밀리고 겨울에 쫓기면서도 이상하게 여유로운 시절. 오래 머물지 않을 걸 알기에 더 애써 바라보게 된다. 나는 조금 더 천천히 숨 쉬면서 지금만큼은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지나가는 조용한 풍경에 머물기로 한다. 앞으로 다가올 다음 계절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든 나는 이 짧고 고요한 찬란을 마음 놓고 낭비해 보기로 한다. 어쩌면 아무 일도 없는 날들이 가장 많은 걸 남길지도 모른다. 별일이 없어도 할 말은 자꾸 생긴다.


「 에리카
여성 전용 헬스장 ‘샤크짐’ 공동대표. 사무직 직장인으로 살다가 30대에 완전한 ‘운동인’으로 각성했다. 〈떼인 근력 찾아드립니다〉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