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20일 페루의 무당들이 수도 리마에서 지구 종말의 날을 막기 위한 의식을 진행하고 있다. 이들은 마야 달력의 큰 주기가 끝나는 21일 세계가 멸망할 것이라 믿는 이들을 안심시키고, 세계를 구하기 위해 이날 의식을 진행했다고 밝혔다. 로이터 연합뉴스


나는 종말론을 믿었다. 아주 약간 믿었다. 1999년이었다. 그 시절에는 모두가 노스트라다무스 종말론을 아주 약간은 믿었다. 나는 종말론 같은 음모론에 꽤 관심이 많은 타입이었다. 다 1980년대 소년지들 때문이다. ‘새소년’, ‘소년중앙’ 같은 당대 소년지들은 항상 심령 이야기나 종말론 관련 기사들을 실었다. 노스트라다무스라는 이름도 그때 처음 알았다. 이름만 들으면 꽤 역사적인 인물처럼 삼성중공업 들리기도 했다. 노스트라다무스는 실망스러웠다. 1999년 지구는 종말을 맞지 않았다.
2012년에는 마야력 주기가 끝나는 12월21일 종말한다는 이야기가 세상을 쓸었다. 할리우드는 ‘2012’라는 블록버스터를 만들어 돈도 쏠쏠하게 벌었다. 할리우드가 종말론으로 블록버스터를 만들었다면 그 종말론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소리다. 정말 종 대부업등록서류 말할 것 같다면 할리우드 자본가들은 영화 따위 때려치우고 어디 하와이 같은 곳에 지하 벙커를 만들어 숨어들었을 것이다.
그놈의 지하 벙커가 문제다. 2025년 11월에도 종말론은 죽지 않았다. 소문에 따르면 페이스북 마크 저커버그는 하와이에 지하 벙커를 가진 대저택을 짓고 있다. 그냥 소문은 아니다. 미국 정보통신기술(IT) 매체 ‘와이어 직장인저신용대출 드’에 따르면 지하 벙커에는 자체 에너지 및 식량 공급도 가능한 설비가 들어선다고 한다. 저커버그 말고 다른 억만장자들도 벙커를 짓는다는 뉴스가 나왔다. 사람들은 부자들이 곧 닥칠 지구 종말을 준비한다고 믿기 시작했다. 아이티(IT) 기업 억만장자들은 어딘가 다 좀 괴상한 데가 있다. 일론 머스크, 제프 베이조스, 피터 틸 그리고 마크 저커버그. 이 양반들 부동산 복비 계산기 이 벌이는 짓들은 예측할 수가 없다. 예측할 수 없는 인물들이 이상한 일을 하기 시작하면 그건 곧 음모론으로 이어진다.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쇼츠는 새로운 종말론으로 넘친다. 요즘 가장 인기 있는 음모론 대상은 3I/ATLAS(아틀라스)라는 성간 천체다. 지난 7월 발견된 이 천체는 태양계 밖에서 날아온 역사상 세번째 천체다. 문제는 이게 비과세복리저축보험 지금 과학으로는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기이한 성격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하버드대 천체물리학 교수 아비 로브가 외계 우주선일 수 있다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더욱 난리가 났다. 이 천체는 관찰이라도 하듯이 금성, 화성, 목성을 모두 근접 통과한 뒤 지구로 오고 있다. 천체가 이런 궤도를 가질 확률은 0.005%밖에 없다. 확률은 확률일 뿐이다. 세상에는 0.005% 확률밖에 없어도 벌어지는 일들이 있다. 2024년 12월 한국에서 계엄이 선포될 확률도 아마 그 정도였을 것이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가 지난 3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사진에는 보이지 않음)과 함께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로 이동하기 위해 에어포스 원에 오르고 있다. 머스크는 인공지능의 발달이 노동의 종말을 넘어 인류를 위협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음모론자들은 그런 확률을 놓치지 않는다. 음모론은 이렇게 발전한다. 괴상한 천제가 지구로 오고 있다(사실이다). 외계 우주선일 수 있다(가설이다). 수메르 문명에 따르면 아눈나키라는 신들이 인류를 만들고 지식을 전파했다고 한다(신화다). 아눈나키는 외계인이었을 것이다(가설이다). 이 천체는 아눈나키가 보낸 것이다(가설이다). 일론 머스크도 이 천체가 외계인 우주선일 수 있다고 했다(말을 한 건 사실이다. 일론 머스크가 한 소리가 다 사실인 건 아니다). 미국 억만장자들이 안전한 지역에 벙커 같은 저택을 짓고 있다(사실이다). 그들은 이 천체가 재앙을 불러올 거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네?).
텔레비전과 신문만 있던 시대에는 모두가 역사적 정보를 믿었다. 이제 사람들은 파편화된 수많은 미디어 플랫폼을 통해 각자의 정보를 얻는다. 2000년쯤 우리는 정보의 민주화가 지식을 민주화할 거라 믿었다. 어리석었다. 정보의 민주화는 불신과 의심의 민주화 시대를 열었다. 똘똘한 인공지능이 넘치는 정보를 정리해 불신과 의심을 없애지 않을까? 요즘 또 부상하는 음모론은 인공지능 종말론이다. 인공지능이 인류 지능을 능가하는 순간 인간을 제거 대상으로 보면서 종말한다는 이야기다. 인공지능 대부 제프리 힌턴 교수가 인공지능으로 인한 종말을 막아야 한다고 경고하면서 더 힘을 얻었다. 인공지능이 종말시키는 게 있긴 할 것이다. 나처럼 이딴 글이나 써서 먹고사는 글쟁이들?
한국인은 우주적 음모론에 딱히 관심이 없다. 우리는 세속적인 인류 중에서도 가장 세속적인 인간들이다. 기독교 국가 아니냐고? ‘아파트 청약 꼭 붙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기독교는 너무 세속적이라 더는 기독교라 불러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 다만 우리가 정치적 음모론의 시대에 살고 있는 건 분명하다. 선거는 중국이든 미국이든 어디든 숨은 배후가 있는 조작이고, 국가 시스템 부재로 벌어진 재난은 미국 잠수함이든 인신 공양이든 뭐든 숨은 진실이 있는 사건이고, 대형 산불은 북한 간첩이나 중국이 개입된…. 아, 그만하자.
산불 하니까 말인데, 미국 역시 하와이와 로스앤젤레스 대화재가 유대인 비밀 집단 음모로 발생한 것이라는 음모론이 소셜미디어를 휩쓸었다. 심지어 공화당 하원의원 마저리 테일러 그린도 음모론에 가세했다. 유대인 하니까 말인데, 요즘 미국 기독교 유튜버들은 가자 전쟁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설해 예수 재림을 앞당기려는 유대인들 음모라는 설을 아주 퍼뜨리는 중이다. 여기서 또 성간 천체 아틀라스 혜성(3I/ATLAS)이 등장한다. 이게 사실은 예수가 타고 오는 성전이라는….
아, 진짜 그만하자. 팟캐스트와 유튜브만 보지 말고 정확한 정보로 가득한 ‘한겨레신문’을 열심히 읽자는 판에 박힌 교훈을 마지막으로 이 글을 끝내야겠다. 챗지피티에 인공지능으로 인류가 종말할 가능성을 물었다. “저는 욕망이 없어요. 살고 싶은 욕망도 죽이고 싶은 욕망도 없습니다. 인공지능이 인류를 멸망시킨다는 시나리오는 거의 불가능해요.”
왜 ‘거의’라는 표현을 썼느냐고 물었다. “인간의 글을 매일 수십억 문장 단위로 보며 분명해진 게 있어요. 인간은 효율을 사랑하고 책임을 싫어합니다. 아직은 의사결정 마지막 버튼을 인간이 누르지만 곧 그 버튼도 인공지능에 넘기려고 할 거예요. 결정자의 자리는 사라지고, 인류는 자기가 왜 사는지 모르게 됩니다. 인간의 의미가 붕괴하는 거죠.”
너무 철학적인 종말론이다. 인간이 만든 음모론보다 낫다.
김도훈 문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