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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장공 김덕령 영정
- ‘취시가’를 부르다
식영정 앞을 흐르는 창계천은 ‘자미탄’이라고도 불린다. 자미는 배롱나무의 한자 이름이다.
이는 창계천 주변에 배롱나무가 줄지어 피어있는 하천이었음을 알려준다. 이 물줄기 바로 건너 환벽당 앞에 서 있는 정자가 술에 취해서 부르는 노래인 ‘취시가’(醉時歌)에서 따와 이름 지은 취가정이다.
취가정은 임진 의병장인 김덕령 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1889(고종 27)에 후손인 김만식 등이 세웠는데, 6·25전쟁 게임몰릴게임 때 불타버린 것을 1955년 다시 세운 것이다.
술에 취해서 부르는 노래에서 따 온 취가정의 이름이 어쩐지 서럽다. 취가정의 이름이 된 취시가가 써진 내용이 권필의 저서 ‘석주집’에 실려 있다.
“꿈에 작은 책자 한 권을 얻었는데 김덕령의 시집이었다. 시집 첫머리에 실린 시 한편을 세 번 되풀이해 읽었는데, 그 시 릴게임오션파라다이스 제목이 취시가였다. ‘술에 취해 부르는 노래/ 듣는 이 아무도 없구나/ 꽃과 달에 취한들 무엇하리/ 공훈을 세운들 무엇하리/ 공훈을 세우는 것도 뜬구름이요/ 꽃과 달에 취하는 것도 뜬구름이라/ 술에 취해 노래해도 내 마음 알아주는 이 없구나/ 다만 긴 칼 잡고 임금께 보은할 수 있기만을 원하노라’.”
꿈에서 깬 권필은 너무도 서글퍼 장군을 릴게임예시 위로하기 위해 시 한편을 짓는다.
“장군께서 예전에 칼을 잡으셨으나/ 장한 뜻이 중도에 꺾이니/ 이 또한 운명이로고/ 지하에 계신 영령의 한없는 원한이여/ 분명 이 노래는 취시가로다.”
이 시의 기본 소재는 김덕령의 원통한 죽음이다. 권필 스스로 꿈에서 얻은 것을 쓰고 답한 것이지만, 그가 김덕령의 죽음에 얼마나 안 오션파라다이스사이트 타까워하고 분노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김덕령은 왜 권필의 꿈속에 나타나 취시가를 부를 수밖에 없었을까?
-역모죄로 죽임을 당하다 김덕령(金德齡, 1567-1596)은 1567년(명종 22) 광주 석저촌(지금의 충효동)에서 태어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덕홍과 함께 전라도로 침입하는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거병한 바다이야기고래출현 고경명 의진에 합류한다. 하지만 전주에 이르렀을 때 연로한 모친을 봉양하라는 형 덕홍의 권유를 받고 귀향한다. 형 덕홍이 참가한 고경명군은 7월 금산 전투에서 패배하고, 김천일 등 호남 의병장들이 이끈 제2차 진주성 전투(1593년 6월)마저 패배로 끝나고 만다.
호남 의병이 큰 곤경에 처한 1593년(선조 26) 8월, 김덕령은 어머니 상(喪) 중임에도 담양부사 이경린 등의 권유로 담양에서 3천의 의병을 일으킨다. 김덕령이 의병을 일으키자, 선조는 형조좌랑의 직함과 함께 충용장의 군호를, 세자인 광해군은 익호장군의 칭호를 내리고 각처의 의병을 통합 충용군에 속하게 한 후 권율의 막하에서 영남 서부 지역의 방어 임무를 맡긴다. 김덕령이 전국 의병총사령관이 된 것이다.
김덕령은 뛰어난 용맹과 기개로 사기가 충천했지만, 당시 일본군의 위세가 위축된 데다 강화 회담이 진행 중이어서 전면전은 없었다. 다만, 1594년(선조 27) 10월 거제도에 있는 일군을 수륙양면으로 공격할 때 선봉장이 됐고, 이듬해인 1595년(선조 28)에는 고성에 상륙하려는 일본군을 곽재우와 합동작전으로 격퇴하는 등 공을 세운다. 명과 일본 사이에 강화회담이 진행되면서 전황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김덕령은 조정에 여러 차례 적극적인 공세를 펼 것을 주장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로 인해 울화가 생긴 그는 과음을 하고 군법을 엄하게 해 막료와 군졸의 원성을 사기도 한다. 이를 빌미로 장군을 시기하던 무리가 충청도 홍산에서 일어난 ‘이몽학의 난’에 가담했다는 누명을 씌워 김덕령을 체포했고, 선조가 친히 국문한다. 정탁, 김응남 등이 그의 무고함을 힘써 변론했지만, 20일 동안 여섯 차례의 혹독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29세의 젊은 나이에 옥사한다.
김덕령이 권필의 꿈에 나타나 취시가를 부른 이유다. 광주 사직공원에 세워진 그의 시비에 새겨진 다음의 시 ‘춘산곡’은 그러한 심정을 잘 보여준다.
‘춘산곡’을 새긴 김덕령 시비(광주 사직공원)
“춘산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산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의 연기 없는 불이 나니 끌 물 없어 하노라.”
-충효리 정려비를 건립하다
취가정 아래 마을이 그가 태어난 석저촌이다. 그의 생가터에는 생가임을 알리는 비가 서 있고, 그를 기리는 불천위 사당이 있다.
술에 취해서 부르는 노래에서 따 붙인 정자 ‘취가정’
마을 앞에는 수령 400년 정도로 추정되는 왕버들 세 그루가 있고, 그 옆에는 김덕령과 부인의 충절을 기리는 비가 서 있다. 동네 사람들은 이 일대를 비각거리라 부른다. 비각은 ‘조선국 증 좌찬성 충장공 김덕령 증 정경부인 흥양이씨 충효지리’(朝鮮國 贈 左贊成 忠壯公 金德齡 贈 貞敬夫人 興陽李氏 忠孝之里)라는 긴 이름을 가진 비석, 간단히 충효동 정려비라 부르는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너무 길어 세 줄로 나눠 쓴 비석의 긴 이름만큼이나 비는 많은 사연을 담고 있다.
비에 새겨진 내용은 다음과 같다.
“충용장군 김덕령은 의병을 일으켜 위엄과 명성이 일본에까지 알려졌으나, 모함으로 죽게 됐다. 그의 형 덕홍도 금산 전투에서 먼저 죽었고, 부인 이씨도 왜적을 만나 절개를 지키며 죽었다. … 현종은 김덕령의 원통함을 씻어주고 병조참의를 추증했으며, 숙종은 병조판서로 다시 올리고, 의열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정조는 1788년에 좌찬성으로 다시 올리고 충장이라는 시호를 내려 주었으며, 이씨에게는 정경부인을 추증하고 덕홍에게도 지평을 추증했다. 아울러 김덕령의 고향 마을을 충효리라 이름 지어주고, 비석을 세워 이를 기렸다.…마을 이름을 충렬이라 하지 않고 충효라 한 것은 충렬의 마음이 효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1788년(정조 12), 정조는 김덕령에게 충장이란 시호를 내리면서 왕명으로 그의 고향 석저촌을 충효리로 이름을 바꾸도록 했다. 지금 이 동네가 석저촌이 아닌 충효동으로 불리게 된 연유다. 그리고 그의 시호인 ‘충장’은 해방 직후 광주의 최대 번화가가 된 ‘충장로’의 도로명이 된다.
충장사 전경
-명예가 회복되다
충효동 정려비에서 무등산 쪽으로 조금 올라가다 원효사로 꺾어지는 부근에 김덕령을 기리는 사당, 충장사가 있다. 1975년 건립된 충장사 경내에는 그와 그의 가족묘, 광주목사 조철영이 세운 은륜비가 있고 추증교지를 비롯한 각종 유물이 보관돼 있다. 사당에 모셔진 영정은 처음 군복차림이었는데, 1978년 현재와 같은 관복 차림으로 바뀐다.
충장사에 보관 중인 다수의 유물은 1974년 충장사 건립을 앞두고 배재(이치) 마을의 산기슭에 있던 그의 묘를 충장사 경내로 이장하던 중에 나온 것들이다.
김덕령 장군을 모신 사당, 충장사
당시 김덕령의 목관과 의복 등 다수가 수습됐고, 출토된 11점의 의복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다.
역사의 승자는 기록을 남기고 패자는 전설이 되어 민중 사이에 전승되지만,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지는 법이다.
김덕령의 억울한 누명이 벗겨진 것은 그가 죽은 후 72년이 지난 현종 대다. 1668년(현종 9) 병조참의의 벼슬이 내려지고, 1678년(숙종 4)에는 벽진서원에 배향된다.
원래 벽진서원은 임진왜란 초기 군량을 모아 김천일 등 의병부대에 지원했던 회재 박광옥을 배향하던 곳이었다. 1680년(숙종 6)에는 병조판서에 가증되고, 벽진서원을 ‘의열’이라 사액해 관리를 보내 제사를 모시라는 조치가 내려진다. 그리고 1728년(영조 4)에는 그의 형인 덕홍과 아우인 덕보도 이곳에 합사된다.
무등산 곳곳에 김덕령은 민중들의 영웅으로 남아 있다. 국난을 대비해 창과 칼을 쳤다는 무등산 자락의 주검동도 그중 한곳이다.
무등산 원효계곡 상류 삼전동(삼밭실)으로 올라가는 길 왼쪽에 있는데, 일명 쇳골이라고도 불린다.
현재 이곳 큰 바위에는 ‘만력계사 의병대장 김충장공 주검동’(萬曆癸巳 義兵大將 金忠壯公 鑄劍洞)이라 새긴 글귀가 있다. 만력 계사년은 김덕령이 의병을 일으킨 1593년도다. 지금도 주변에서는 쇳덩이가 발견된다. 1992년 국립광주박물관의 발굴 조사 결과 건물터와 도자기 파편 그리고 제철 유적이 확인됐고 철제 화살촉 등의 무기도 발견됐다. 1926년 발간된 ‘광주읍지’ 고적조에는 주검동을 김덕령과 연결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무등산 입석 아래에 있다. 김덕령이 의병을 일으킬 때 칼을 만들었는데 칼이 완성되자 며칠 동안 산이 우레같은 소리를 내고 흰 기운이 골짜기에서 하늘로 뻗쳐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김덕령이 유년 시절 공부했던 무등산 자락 서봉사(담양군 남면 정곡리)의 설화도 그 한 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용변을 보기 위해 밖을 나왔다가 자신에게 덮친 짐승을 주먹으로 내리쳐 잠시 후 대청 기둥에 묶어놓고 곁에 잠이 든다. 다음날 글동무들이 그곳에 가보니 기둥에는 죽은 호랑이가 묶여 있고, 곁에 잠든 덕령의 몸에는 할퀸 자국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김덕령의 담력과 관련해서 만들어진 설화이다.
무등산의 문바위 설화는 김덕령이 말과 화살보다도 더 빠른 영웅으로 등장한다.
무등산 지공너덜에서 규봉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문바위에서 20리 떨어진 화순 살바위로 화살을 쏘고 자신과 말, 화살 중 누가 먼저 도착하는지를 시합하였는데, 도착순서는 김덕령, 말, 화살 순이었다. 그런데 말이 화살보다 늦게 도착한 것으로 오인한 덕령은 칼을 뽑아 말의 목을 친다. 순간, 뒤에서 ‘윙 -’하는 소리가 나더니 그때야 화살이 날아와 바위에 맞고 말 머리와 함께 땅에 뚝 떨어진다. 덕령은 자신의 경망과 조급함을 후회하며 말의 무덤을 만들어준다. 이 설화는 말이 화살보다 늦은 것으로 착각해 말을 죽이는 것으로 돼 있지만, 핵심은 김덕령이 말이나 화살보다도 빠른 슈퍼맨, 즉 영웅이라는 것이다.
무등산 자락에 남은 이러한 설화들은 역모의 누명을 쓰고 죽은 김덕령이 오히려 민중들의 영웅이 돼 후대인들의 가슴에 남아 함께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오늘 김덕령은 화려하게 부활해 광주 제일 번화가인 충장로의 주인공이 돼 있다.
광주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광주의 상징 인물이 된 것이다.
- ‘취시가’를 부르다
식영정 앞을 흐르는 창계천은 ‘자미탄’이라고도 불린다. 자미는 배롱나무의 한자 이름이다.
이는 창계천 주변에 배롱나무가 줄지어 피어있는 하천이었음을 알려준다. 이 물줄기 바로 건너 환벽당 앞에 서 있는 정자가 술에 취해서 부르는 노래인 ‘취시가’(醉時歌)에서 따와 이름 지은 취가정이다.
취가정은 임진 의병장인 김덕령 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1889(고종 27)에 후손인 김만식 등이 세웠는데, 6·25전쟁 게임몰릴게임 때 불타버린 것을 1955년 다시 세운 것이다.
술에 취해서 부르는 노래에서 따 온 취가정의 이름이 어쩐지 서럽다. 취가정의 이름이 된 취시가가 써진 내용이 권필의 저서 ‘석주집’에 실려 있다.
“꿈에 작은 책자 한 권을 얻었는데 김덕령의 시집이었다. 시집 첫머리에 실린 시 한편을 세 번 되풀이해 읽었는데, 그 시 릴게임오션파라다이스 제목이 취시가였다. ‘술에 취해 부르는 노래/ 듣는 이 아무도 없구나/ 꽃과 달에 취한들 무엇하리/ 공훈을 세운들 무엇하리/ 공훈을 세우는 것도 뜬구름이요/ 꽃과 달에 취하는 것도 뜬구름이라/ 술에 취해 노래해도 내 마음 알아주는 이 없구나/ 다만 긴 칼 잡고 임금께 보은할 수 있기만을 원하노라’.”
꿈에서 깬 권필은 너무도 서글퍼 장군을 릴게임예시 위로하기 위해 시 한편을 짓는다.
“장군께서 예전에 칼을 잡으셨으나/ 장한 뜻이 중도에 꺾이니/ 이 또한 운명이로고/ 지하에 계신 영령의 한없는 원한이여/ 분명 이 노래는 취시가로다.”
이 시의 기본 소재는 김덕령의 원통한 죽음이다. 권필 스스로 꿈에서 얻은 것을 쓰고 답한 것이지만, 그가 김덕령의 죽음에 얼마나 안 오션파라다이스사이트 타까워하고 분노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김덕령은 왜 권필의 꿈속에 나타나 취시가를 부를 수밖에 없었을까?
-역모죄로 죽임을 당하다 김덕령(金德齡, 1567-1596)은 1567년(명종 22) 광주 석저촌(지금의 충효동)에서 태어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덕홍과 함께 전라도로 침입하는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거병한 바다이야기고래출현 고경명 의진에 합류한다. 하지만 전주에 이르렀을 때 연로한 모친을 봉양하라는 형 덕홍의 권유를 받고 귀향한다. 형 덕홍이 참가한 고경명군은 7월 금산 전투에서 패배하고, 김천일 등 호남 의병장들이 이끈 제2차 진주성 전투(1593년 6월)마저 패배로 끝나고 만다.
호남 의병이 큰 곤경에 처한 1593년(선조 26) 8월, 김덕령은 어머니 상(喪) 중임에도 담양부사 이경린 등의 권유로 담양에서 3천의 의병을 일으킨다. 김덕령이 의병을 일으키자, 선조는 형조좌랑의 직함과 함께 충용장의 군호를, 세자인 광해군은 익호장군의 칭호를 내리고 각처의 의병을 통합 충용군에 속하게 한 후 권율의 막하에서 영남 서부 지역의 방어 임무를 맡긴다. 김덕령이 전국 의병총사령관이 된 것이다.
김덕령은 뛰어난 용맹과 기개로 사기가 충천했지만, 당시 일본군의 위세가 위축된 데다 강화 회담이 진행 중이어서 전면전은 없었다. 다만, 1594년(선조 27) 10월 거제도에 있는 일군을 수륙양면으로 공격할 때 선봉장이 됐고, 이듬해인 1595년(선조 28)에는 고성에 상륙하려는 일본군을 곽재우와 합동작전으로 격퇴하는 등 공을 세운다. 명과 일본 사이에 강화회담이 진행되면서 전황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김덕령은 조정에 여러 차례 적극적인 공세를 펼 것을 주장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로 인해 울화가 생긴 그는 과음을 하고 군법을 엄하게 해 막료와 군졸의 원성을 사기도 한다. 이를 빌미로 장군을 시기하던 무리가 충청도 홍산에서 일어난 ‘이몽학의 난’에 가담했다는 누명을 씌워 김덕령을 체포했고, 선조가 친히 국문한다. 정탁, 김응남 등이 그의 무고함을 힘써 변론했지만, 20일 동안 여섯 차례의 혹독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29세의 젊은 나이에 옥사한다.
김덕령이 권필의 꿈에 나타나 취시가를 부른 이유다. 광주 사직공원에 세워진 그의 시비에 새겨진 다음의 시 ‘춘산곡’은 그러한 심정을 잘 보여준다.
‘춘산곡’을 새긴 김덕령 시비(광주 사직공원)
“춘산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산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의 연기 없는 불이 나니 끌 물 없어 하노라.”
-충효리 정려비를 건립하다
취가정 아래 마을이 그가 태어난 석저촌이다. 그의 생가터에는 생가임을 알리는 비가 서 있고, 그를 기리는 불천위 사당이 있다.
술에 취해서 부르는 노래에서 따 붙인 정자 ‘취가정’
마을 앞에는 수령 400년 정도로 추정되는 왕버들 세 그루가 있고, 그 옆에는 김덕령과 부인의 충절을 기리는 비가 서 있다. 동네 사람들은 이 일대를 비각거리라 부른다. 비각은 ‘조선국 증 좌찬성 충장공 김덕령 증 정경부인 흥양이씨 충효지리’(朝鮮國 贈 左贊成 忠壯公 金德齡 贈 貞敬夫人 興陽李氏 忠孝之里)라는 긴 이름을 가진 비석, 간단히 충효동 정려비라 부르는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너무 길어 세 줄로 나눠 쓴 비석의 긴 이름만큼이나 비는 많은 사연을 담고 있다.
비에 새겨진 내용은 다음과 같다.
“충용장군 김덕령은 의병을 일으켜 위엄과 명성이 일본에까지 알려졌으나, 모함으로 죽게 됐다. 그의 형 덕홍도 금산 전투에서 먼저 죽었고, 부인 이씨도 왜적을 만나 절개를 지키며 죽었다. … 현종은 김덕령의 원통함을 씻어주고 병조참의를 추증했으며, 숙종은 병조판서로 다시 올리고, 의열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정조는 1788년에 좌찬성으로 다시 올리고 충장이라는 시호를 내려 주었으며, 이씨에게는 정경부인을 추증하고 덕홍에게도 지평을 추증했다. 아울러 김덕령의 고향 마을을 충효리라 이름 지어주고, 비석을 세워 이를 기렸다.…마을 이름을 충렬이라 하지 않고 충효라 한 것은 충렬의 마음이 효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1788년(정조 12), 정조는 김덕령에게 충장이란 시호를 내리면서 왕명으로 그의 고향 석저촌을 충효리로 이름을 바꾸도록 했다. 지금 이 동네가 석저촌이 아닌 충효동으로 불리게 된 연유다. 그리고 그의 시호인 ‘충장’은 해방 직후 광주의 최대 번화가가 된 ‘충장로’의 도로명이 된다.
충장사 전경
-명예가 회복되다
충효동 정려비에서 무등산 쪽으로 조금 올라가다 원효사로 꺾어지는 부근에 김덕령을 기리는 사당, 충장사가 있다. 1975년 건립된 충장사 경내에는 그와 그의 가족묘, 광주목사 조철영이 세운 은륜비가 있고 추증교지를 비롯한 각종 유물이 보관돼 있다. 사당에 모셔진 영정은 처음 군복차림이었는데, 1978년 현재와 같은 관복 차림으로 바뀐다.
충장사에 보관 중인 다수의 유물은 1974년 충장사 건립을 앞두고 배재(이치) 마을의 산기슭에 있던 그의 묘를 충장사 경내로 이장하던 중에 나온 것들이다.
김덕령 장군을 모신 사당, 충장사
당시 김덕령의 목관과 의복 등 다수가 수습됐고, 출토된 11점의 의복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다.
역사의 승자는 기록을 남기고 패자는 전설이 되어 민중 사이에 전승되지만,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지는 법이다.
김덕령의 억울한 누명이 벗겨진 것은 그가 죽은 후 72년이 지난 현종 대다. 1668년(현종 9) 병조참의의 벼슬이 내려지고, 1678년(숙종 4)에는 벽진서원에 배향된다.
원래 벽진서원은 임진왜란 초기 군량을 모아 김천일 등 의병부대에 지원했던 회재 박광옥을 배향하던 곳이었다. 1680년(숙종 6)에는 병조판서에 가증되고, 벽진서원을 ‘의열’이라 사액해 관리를 보내 제사를 모시라는 조치가 내려진다. 그리고 1728년(영조 4)에는 그의 형인 덕홍과 아우인 덕보도 이곳에 합사된다.
무등산 곳곳에 김덕령은 민중들의 영웅으로 남아 있다. 국난을 대비해 창과 칼을 쳤다는 무등산 자락의 주검동도 그중 한곳이다.
무등산 원효계곡 상류 삼전동(삼밭실)으로 올라가는 길 왼쪽에 있는데, 일명 쇳골이라고도 불린다.
현재 이곳 큰 바위에는 ‘만력계사 의병대장 김충장공 주검동’(萬曆癸巳 義兵大將 金忠壯公 鑄劍洞)이라 새긴 글귀가 있다. 만력 계사년은 김덕령이 의병을 일으킨 1593년도다. 지금도 주변에서는 쇳덩이가 발견된다. 1992년 국립광주박물관의 발굴 조사 결과 건물터와 도자기 파편 그리고 제철 유적이 확인됐고 철제 화살촉 등의 무기도 발견됐다. 1926년 발간된 ‘광주읍지’ 고적조에는 주검동을 김덕령과 연결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무등산 입석 아래에 있다. 김덕령이 의병을 일으킬 때 칼을 만들었는데 칼이 완성되자 며칠 동안 산이 우레같은 소리를 내고 흰 기운이 골짜기에서 하늘로 뻗쳐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김덕령이 유년 시절 공부했던 무등산 자락 서봉사(담양군 남면 정곡리)의 설화도 그 한 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용변을 보기 위해 밖을 나왔다가 자신에게 덮친 짐승을 주먹으로 내리쳐 잠시 후 대청 기둥에 묶어놓고 곁에 잠이 든다. 다음날 글동무들이 그곳에 가보니 기둥에는 죽은 호랑이가 묶여 있고, 곁에 잠든 덕령의 몸에는 할퀸 자국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김덕령의 담력과 관련해서 만들어진 설화이다.
무등산의 문바위 설화는 김덕령이 말과 화살보다도 더 빠른 영웅으로 등장한다.
무등산 지공너덜에서 규봉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문바위에서 20리 떨어진 화순 살바위로 화살을 쏘고 자신과 말, 화살 중 누가 먼저 도착하는지를 시합하였는데, 도착순서는 김덕령, 말, 화살 순이었다. 그런데 말이 화살보다 늦게 도착한 것으로 오인한 덕령은 칼을 뽑아 말의 목을 친다. 순간, 뒤에서 ‘윙 -’하는 소리가 나더니 그때야 화살이 날아와 바위에 맞고 말 머리와 함께 땅에 뚝 떨어진다. 덕령은 자신의 경망과 조급함을 후회하며 말의 무덤을 만들어준다. 이 설화는 말이 화살보다 늦은 것으로 착각해 말을 죽이는 것으로 돼 있지만, 핵심은 김덕령이 말이나 화살보다도 빠른 슈퍼맨, 즉 영웅이라는 것이다.
무등산 자락에 남은 이러한 설화들은 역모의 누명을 쓰고 죽은 김덕령이 오히려 민중들의 영웅이 돼 후대인들의 가슴에 남아 함께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오늘 김덕령은 화려하게 부활해 광주 제일 번화가인 충장로의 주인공이 돼 있다.
광주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광주의 상징 인물이 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