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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목 기자]
1950년대 프랑코 총통 독재 치하 스페인, 북부 작은 도시에 사는 8살 소녀 '에스트레야'는 아빠를 사랑하고 신뢰한다. 하지만 그에겐 수상한 점이 많다. 통 자신의 얘기를 들려주지 않는다. 그리고 자주 다락방에 틀어박혀 문을 잠그고 자기만의 시간을 보낸다. 딸을 아끼면서도 아빠는 침묵과 비밀에 둘러싸인 존재다.
에스트레야는 언젠가부터 아빠에게 엄마 말고 다른 여자가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에 사로잡힌다. 딸은 상대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 추리와 미행을 거듭하며 조금씩 실체에 다가선다. 속 시원한 정보를 얻진 못해도 에스트레야는 막연하나마 그녀가 남쪽에 있다 릴게임갓 는 심증을 굳힌다. 추위가 가시지 않는 이곳과는 딴판인 항상 따스하다는 땅, 아빠가 태어나 자랐지만 떠나야 했던 '남쪽'을 향한 갈망은 멈출 수 없다.
반세기 동안 단 4편의 장편으로 남은 감독
릴게임예시
▲ <남쪽> 스틸
ⓒ 엠엔엠 인터내셔널
빅토르 바다이야기예시 에리세는 1973년 <벌집의 정령>을 통해 감독으로 이름을 얻는다. 그러나 이후로 20세기에 단 3편 장편을 대략 10년 단위로 선보였을 뿐이다. 1983년 <남쪽>, 1992년 <햇빛 속의 모과나무>가 전부다. 그나마 21세기가 되자 10년 주기마저 끊어졌다. 2000년대와 2010년대에 짧은 단편을 하나씩 선뵈긴 했지만 그뿐이다. 작품은 평단과 예술영 바다이야기무료 화 관객에 찬사와 명성을 떨쳤지만, 언젠가부터 고전으로 언급될 뿐, 과거 존재로 잊히기 시작했다.
감독은 무려 30년 만인 2023년, 신작 <클로즈 유어 아이즈>를 세상에 내놓는다. 빅토르 에리세가 아직 살아 있었냐며 놀랄 정도의 사건이다. 21세기에 처음 내놓는 장편이자 전작과 한 세대 넘게 시차가 나는 신작에 사람 오션파라다이스다운로드 들은 반신반의했으나 막상 영화가 공개되자 격찬이 휩쓴다. 작가의 실력은 조금도 녹슬지 않고 숙성 그 자체였던 것이다.
해마다 유수의 영화제가 신예 작가를 발굴하는 데 열심이다. 그런데도 은둔 감독의 신작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이들이 세계 각국에 적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21세기 유행처럼 SNS 스타도 아니고 언론 플레이로 자신을 포장하는 데 관심도 없는 노장이 잊히기는커녕, 대체 불가한 영화 예술가로 인정받는 데엔 작품이 유일한 증거일 수밖에 없다.
왜 그들은 '남쪽'에 집착하는가
▲ <남쪽> 스틸
ⓒ 엠엔엠 인터내셔널
영화는 딸의 시선으로 보는 가족 연대기, 미스터리한 아빠의 행적 관찰로 그린다. 에스트레야가 8살부터 15살까지, 유년기의 끝에서 아이와 어른의 경계로 향할 때까지다. 스페인 북부 황량한 작은 도시 바깥은 인적이 드물다. 멀리 남쪽에서 흘러온 주인공 가족은 도시 경계에 걸친 무인 지대에 외롭게 자리한 단독주택을 빌려 거주한다. 집은 '갈매기'란 별칭으로 불린다. 이름처럼 갈매기를 본딴 조형물이 집을 돋보이게 한다.
아빠는 어린 딸에게 신비스러운 존재다. 그는 동네 공공병원 의사이자 건조한 대지에 숨은 물길을 휴대하던 진자 추만 갖고 찾아내는 능력자다. 하지만 꼭 필요한 의사소통 외엔 거의 말을 않는다. 시간이 비면 엄마 표현대로 '특별한 힘이 깃든' 다락방에 틀어박힌다. 궁금한 딸에게 엄마는 아빠의 과거에 대해 들려준다. 그는 사상이 다른 부친과 불화 끝에 남쪽 고향을 떠나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이곳에 정착한 후에도 남쪽에서 모친과 유모가 몇 년에 한 번 방문하는 게 유일한 교류다.
아빠는 다른 가족과 달리 주일 미사에 참석하지 않는다. 딸의 첫 성체 성사를 축하하기 위해 오랜만에 '두 명의 엄마'가 방문해도 아빠가 과연 올지 누구도 자신하지 못한다. 그러나 어두운 구석에서 그는 조용히 기념식을 지켜보고 꼬마 숙녀와 근사한 춤을 출 만큼 내키지 않아도 가족을 위해 숙일 줄 안다. 그렇게 절대적 믿음의 대상이던 아빠의 근래 석연찮은 행동이 딸을 불안하게 만든다.
'아빠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
'갈매기' 궁전에서 행복한 유년을 보내던 에스트레야에게 예전엔 보이지 않던 균열이 느껴진다. 하지만 아빠의 기이한 조짐은 8살 소녀가 온전하게 소화할 수 없는 영역이다. 다만 아빠가 극장에서 보던 영화 주연 여자배우가 비밀을 푸는 열쇠라는 것만은 알겠다. 미스터리를 쫓는 탐정이 된 딸은 미행과 조사를 이어간다. 아빠와 관계는 소원해지고, 좀 별나도 바른생활 교범 같던 아빠의 행동은 점점 모호해진다. 어느새 운명의 15살 가을이 다가온다.
프랑코 독재정권의 유산을 기억하는 방법
▲ <남쪽> 스틸
ⓒ 엠엔엠 인터내셔널
스페인 현대사에서 선거로 집권한 인민전선 민주 정부를 군사반란으로 전복한 우익 팔랑헤 당과 프랑코 총통의 장기 독재는 40여 년 넘게 이어지며 한동안 스페인을 서유럽과 단절시켰다. 프랑코가 1975년에 죽은 후 후안 카를로스 1세 입헌 군주제가 1981년 부활했지만, 군부독재의 상흔은 스페인 전역에 짙게 남았고 그 잔재는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민주화 이후에도 군부 극단세력의 쿠데타 위기를 넘기고, 내란범 대부분을 '침묵 협정'으로 사면해야 했다. 반란 수괴의 후손과 추종세력 역시 사실상 '귀족'으로 남았다.
의식 있는 창작자라면 이런 역사적 배경을 어떤 식으로건 자신의 작업에 반영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다양한 표현과 접근법을 활용하는 건 작가의 재량이지만, 애초 본인은 물론 두세 다리만 건너도 내전과 독재 희생자와 연결되지 않기가 더 힘든 현실에서 지극히 당연한 결과이다. 빅토르 에리세 역시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독특한 방식으로 자신의 창작물에 비밀 암호문을 입히듯 과거 역사의 풍경을 조각해 놓았다.
데뷔작 <벌집의 정령>은 1936년부터 벌어진 내전에서 쿠데타 세력이 승리한 지 불과 1년 후인 1940년을 배경으로 한다. 전란으로 피폐한 동네에 이동 영화관이 들어서고, '프랑켄슈타인'을 본 소녀는 숲에 초현실적 존재가 숨어 있다고 믿으며 찾으러 나선다. 지역에는 공화파 잔당을 색출하려는 공권력의 감시와 색출이 횡행하는 중이다. 길예르모 델 토로 <판의 미로> 속 베경과 거의 동시기라 같은 시대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비교 사례로도 흥미롭다.
차기작 <남쪽>은 전작에서 물리적으로 10년, 연대기적으로 봐도 10년여 이후를 배경으로 삼았다. 군부독재가 정착한 나라에서 쿠데타 세력에 반대한 이들은 설 자리가 없다. 주인공의 아빠 '어구스틴'은 프랑코 지지자인 부친과 의절하고 고향에서 사실상 추방을 당했다. 남쪽에 남았다면 어떤 불이익을 당했을지 모른다. 에스트레야의 엄마 역시 교사였지만, 군부 집권 후 학교를 그만둬야 했다. 동네에선 이방인인 부모님은 옛날 이야긴 거의 하지 않고 한구석에 묻어둔 채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살아가야 한다.
상징과 은유로 역사의 정방향을 좌표화하다
집안 여자들은 공공연히 드러내기 힘든 내밀한 과거사를 주인공에게 조심스레 들려준다. 하지만 내전을 겪지 않은 딸은 왜 아버지와 아들이 그런 일로 갈등하고 결별해야 하는지 아직 이해하긴 힘들다. 게다가 서슬 시퍼런 프랑코 철권통치가 확고한 시절이라 그저 알고만 있을 수수밖에 도리가 없다. 그러나 왜 화목하던 아빠와 엄마가 다투는지, 자신은 알지 못하는 '남쪽'이 아빠에겐 얼마나 중요한지 어렴풋하게나마 인식한다.
이제 불륜을 의심하던 딸은 다른 각도로 아빠와 불화하며 또 다른 쟁점이 작동한다. 남쪽 고향을 기왕 떠났으니 여기서 새 삶을 꾸려야 하건만, 여전히 유형수처럼 겉으론 침묵, 속으론 방황을 거듭하는 무책임을 지적하는 딸에게 아빠는 솔직하긴 해도 자식이 원하는 답을 들려주지 못한다. 그런 부모 세대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아빠(세대)가 끝내 돌아가지 못한 고향으로 돌아가는 건 이제 자신의 세대가 물려받은 과제다. 영화는 어른이 된 딸의 성장기이자 회고록인 셈이다.
스페인 전체를 양분한 참혹한 내전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 부모 세대의 숙제가 독재 치하에서 오랜 저항 끝에 민주화를 향한 수레바퀴를 돌리게 될 자녀 세대에게 계승된다. 물론 <남쪽>은 그런 거대한 시대적 배경을 큰소리로 외치지 않는다. 그저 시대극 설정으로 최소한 설명하거나 장치에 심어둘 뿐이다. 그러나 약간의 유럽 역사 상식과 함께 영화를 보고 나면 시대상이 작중 인물들의 삶과 행보에 드리운 어둠의 장막을 깨닫는 건 당연한 순서다.
물론 <남쪽>에서 가장 돋보이는 건 빛과 어둠을 마치 근세 서양 회화작품처럼 정갈하게 표현한 이미지, 일상 속 환상성이 가미된 시적 묘사 등의 예술적 성취다. 여기에다 <벌집의 정령>에서 고딕 공포영화를 오마주한 데 이어 이번 작업에서도 히치콕 등 고전 영화가 등장하고, 제목과 연동하듯 방황하는 아빠가 위안을 찾으러 방문하는 극장이 중요한 배경으로 기능한다. 심지어 극장 이름도 그리스 신화 속 낙원을 이르는 '아르카디아'다. 현실에 정착하지 못해 회한에 신음하는 실패한 지식인이 쫓는 미련을 더없이 영화적으로 묘사하는 접근 아닐까.
영화는 아련한 몽환과 기묘한 여백으로 넘실댄다. 여기엔 특별한 이유가 있으니 <남쪽>을 다 본 후 인터넷을 검색해보자. 감독의 아쉬움과 별개로 미완의 영화는 자체로 휼륭하지만, 최초의 비전은 포기할 수 없었다. 무려 40년 후 등장한 후속작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감독의 오랜 화두를 구현한 '완전판'이다. 그래서 <남쪽>을 보고 나면 전작과 후속작을 마저 찾고, 그 소우주를 체험한 감격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영화가 역사를 기억하고 사유하는 결정적 형태다.
<작품정보>
남쪽El surThe South1983 스페인 드라마, 미스터리, 로맨스2026.02.18. 개봉 94분 12세 관람가감독 빅토르 에리세출연 손솔레스 아랑구렌, 이시아르 볼라이인, 오메로 안토누티, 롤라 카르도나원작 아델라이다 가르시아 모랄레스 - 소설 《남쪽》수입/배급 엠엔엠 인터내셔널제공 ㈜레드아이스엔터테인먼트
1950년대 프랑코 총통 독재 치하 스페인, 북부 작은 도시에 사는 8살 소녀 '에스트레야'는 아빠를 사랑하고 신뢰한다. 하지만 그에겐 수상한 점이 많다. 통 자신의 얘기를 들려주지 않는다. 그리고 자주 다락방에 틀어박혀 문을 잠그고 자기만의 시간을 보낸다. 딸을 아끼면서도 아빠는 침묵과 비밀에 둘러싸인 존재다.
에스트레야는 언젠가부터 아빠에게 엄마 말고 다른 여자가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에 사로잡힌다. 딸은 상대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 추리와 미행을 거듭하며 조금씩 실체에 다가선다. 속 시원한 정보를 얻진 못해도 에스트레야는 막연하나마 그녀가 남쪽에 있다 릴게임갓 는 심증을 굳힌다. 추위가 가시지 않는 이곳과는 딴판인 항상 따스하다는 땅, 아빠가 태어나 자랐지만 떠나야 했던 '남쪽'을 향한 갈망은 멈출 수 없다.
반세기 동안 단 4편의 장편으로 남은 감독
릴게임예시
▲ <남쪽> 스틸
ⓒ 엠엔엠 인터내셔널
빅토르 바다이야기예시 에리세는 1973년 <벌집의 정령>을 통해 감독으로 이름을 얻는다. 그러나 이후로 20세기에 단 3편 장편을 대략 10년 단위로 선보였을 뿐이다. 1983년 <남쪽>, 1992년 <햇빛 속의 모과나무>가 전부다. 그나마 21세기가 되자 10년 주기마저 끊어졌다. 2000년대와 2010년대에 짧은 단편을 하나씩 선뵈긴 했지만 그뿐이다. 작품은 평단과 예술영 바다이야기무료 화 관객에 찬사와 명성을 떨쳤지만, 언젠가부터 고전으로 언급될 뿐, 과거 존재로 잊히기 시작했다.
감독은 무려 30년 만인 2023년, 신작 <클로즈 유어 아이즈>를 세상에 내놓는다. 빅토르 에리세가 아직 살아 있었냐며 놀랄 정도의 사건이다. 21세기에 처음 내놓는 장편이자 전작과 한 세대 넘게 시차가 나는 신작에 사람 오션파라다이스다운로드 들은 반신반의했으나 막상 영화가 공개되자 격찬이 휩쓴다. 작가의 실력은 조금도 녹슬지 않고 숙성 그 자체였던 것이다.
해마다 유수의 영화제가 신예 작가를 발굴하는 데 열심이다. 그런데도 은둔 감독의 신작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이들이 세계 각국에 적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21세기 유행처럼 SNS 스타도 아니고 언론 플레이로 자신을 포장하는 데 관심도 없는 노장이 잊히기는커녕, 대체 불가한 영화 예술가로 인정받는 데엔 작품이 유일한 증거일 수밖에 없다.
왜 그들은 '남쪽'에 집착하는가
▲ <남쪽> 스틸
ⓒ 엠엔엠 인터내셔널
영화는 딸의 시선으로 보는 가족 연대기, 미스터리한 아빠의 행적 관찰로 그린다. 에스트레야가 8살부터 15살까지, 유년기의 끝에서 아이와 어른의 경계로 향할 때까지다. 스페인 북부 황량한 작은 도시 바깥은 인적이 드물다. 멀리 남쪽에서 흘러온 주인공 가족은 도시 경계에 걸친 무인 지대에 외롭게 자리한 단독주택을 빌려 거주한다. 집은 '갈매기'란 별칭으로 불린다. 이름처럼 갈매기를 본딴 조형물이 집을 돋보이게 한다.
아빠는 어린 딸에게 신비스러운 존재다. 그는 동네 공공병원 의사이자 건조한 대지에 숨은 물길을 휴대하던 진자 추만 갖고 찾아내는 능력자다. 하지만 꼭 필요한 의사소통 외엔 거의 말을 않는다. 시간이 비면 엄마 표현대로 '특별한 힘이 깃든' 다락방에 틀어박힌다. 궁금한 딸에게 엄마는 아빠의 과거에 대해 들려준다. 그는 사상이 다른 부친과 불화 끝에 남쪽 고향을 떠나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이곳에 정착한 후에도 남쪽에서 모친과 유모가 몇 년에 한 번 방문하는 게 유일한 교류다.
아빠는 다른 가족과 달리 주일 미사에 참석하지 않는다. 딸의 첫 성체 성사를 축하하기 위해 오랜만에 '두 명의 엄마'가 방문해도 아빠가 과연 올지 누구도 자신하지 못한다. 그러나 어두운 구석에서 그는 조용히 기념식을 지켜보고 꼬마 숙녀와 근사한 춤을 출 만큼 내키지 않아도 가족을 위해 숙일 줄 안다. 그렇게 절대적 믿음의 대상이던 아빠의 근래 석연찮은 행동이 딸을 불안하게 만든다.
'아빠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
'갈매기' 궁전에서 행복한 유년을 보내던 에스트레야에게 예전엔 보이지 않던 균열이 느껴진다. 하지만 아빠의 기이한 조짐은 8살 소녀가 온전하게 소화할 수 없는 영역이다. 다만 아빠가 극장에서 보던 영화 주연 여자배우가 비밀을 푸는 열쇠라는 것만은 알겠다. 미스터리를 쫓는 탐정이 된 딸은 미행과 조사를 이어간다. 아빠와 관계는 소원해지고, 좀 별나도 바른생활 교범 같던 아빠의 행동은 점점 모호해진다. 어느새 운명의 15살 가을이 다가온다.
프랑코 독재정권의 유산을 기억하는 방법
▲ <남쪽> 스틸
ⓒ 엠엔엠 인터내셔널
스페인 현대사에서 선거로 집권한 인민전선 민주 정부를 군사반란으로 전복한 우익 팔랑헤 당과 프랑코 총통의 장기 독재는 40여 년 넘게 이어지며 한동안 스페인을 서유럽과 단절시켰다. 프랑코가 1975년에 죽은 후 후안 카를로스 1세 입헌 군주제가 1981년 부활했지만, 군부독재의 상흔은 스페인 전역에 짙게 남았고 그 잔재는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민주화 이후에도 군부 극단세력의 쿠데타 위기를 넘기고, 내란범 대부분을 '침묵 협정'으로 사면해야 했다. 반란 수괴의 후손과 추종세력 역시 사실상 '귀족'으로 남았다.
의식 있는 창작자라면 이런 역사적 배경을 어떤 식으로건 자신의 작업에 반영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다양한 표현과 접근법을 활용하는 건 작가의 재량이지만, 애초 본인은 물론 두세 다리만 건너도 내전과 독재 희생자와 연결되지 않기가 더 힘든 현실에서 지극히 당연한 결과이다. 빅토르 에리세 역시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독특한 방식으로 자신의 창작물에 비밀 암호문을 입히듯 과거 역사의 풍경을 조각해 놓았다.
데뷔작 <벌집의 정령>은 1936년부터 벌어진 내전에서 쿠데타 세력이 승리한 지 불과 1년 후인 1940년을 배경으로 한다. 전란으로 피폐한 동네에 이동 영화관이 들어서고, '프랑켄슈타인'을 본 소녀는 숲에 초현실적 존재가 숨어 있다고 믿으며 찾으러 나선다. 지역에는 공화파 잔당을 색출하려는 공권력의 감시와 색출이 횡행하는 중이다. 길예르모 델 토로 <판의 미로> 속 베경과 거의 동시기라 같은 시대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비교 사례로도 흥미롭다.
차기작 <남쪽>은 전작에서 물리적으로 10년, 연대기적으로 봐도 10년여 이후를 배경으로 삼았다. 군부독재가 정착한 나라에서 쿠데타 세력에 반대한 이들은 설 자리가 없다. 주인공의 아빠 '어구스틴'은 프랑코 지지자인 부친과 의절하고 고향에서 사실상 추방을 당했다. 남쪽에 남았다면 어떤 불이익을 당했을지 모른다. 에스트레야의 엄마 역시 교사였지만, 군부 집권 후 학교를 그만둬야 했다. 동네에선 이방인인 부모님은 옛날 이야긴 거의 하지 않고 한구석에 묻어둔 채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살아가야 한다.
상징과 은유로 역사의 정방향을 좌표화하다
집안 여자들은 공공연히 드러내기 힘든 내밀한 과거사를 주인공에게 조심스레 들려준다. 하지만 내전을 겪지 않은 딸은 왜 아버지와 아들이 그런 일로 갈등하고 결별해야 하는지 아직 이해하긴 힘들다. 게다가 서슬 시퍼런 프랑코 철권통치가 확고한 시절이라 그저 알고만 있을 수수밖에 도리가 없다. 그러나 왜 화목하던 아빠와 엄마가 다투는지, 자신은 알지 못하는 '남쪽'이 아빠에겐 얼마나 중요한지 어렴풋하게나마 인식한다.
이제 불륜을 의심하던 딸은 다른 각도로 아빠와 불화하며 또 다른 쟁점이 작동한다. 남쪽 고향을 기왕 떠났으니 여기서 새 삶을 꾸려야 하건만, 여전히 유형수처럼 겉으론 침묵, 속으론 방황을 거듭하는 무책임을 지적하는 딸에게 아빠는 솔직하긴 해도 자식이 원하는 답을 들려주지 못한다. 그런 부모 세대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아빠(세대)가 끝내 돌아가지 못한 고향으로 돌아가는 건 이제 자신의 세대가 물려받은 과제다. 영화는 어른이 된 딸의 성장기이자 회고록인 셈이다.
스페인 전체를 양분한 참혹한 내전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 부모 세대의 숙제가 독재 치하에서 오랜 저항 끝에 민주화를 향한 수레바퀴를 돌리게 될 자녀 세대에게 계승된다. 물론 <남쪽>은 그런 거대한 시대적 배경을 큰소리로 외치지 않는다. 그저 시대극 설정으로 최소한 설명하거나 장치에 심어둘 뿐이다. 그러나 약간의 유럽 역사 상식과 함께 영화를 보고 나면 시대상이 작중 인물들의 삶과 행보에 드리운 어둠의 장막을 깨닫는 건 당연한 순서다.
물론 <남쪽>에서 가장 돋보이는 건 빛과 어둠을 마치 근세 서양 회화작품처럼 정갈하게 표현한 이미지, 일상 속 환상성이 가미된 시적 묘사 등의 예술적 성취다. 여기에다 <벌집의 정령>에서 고딕 공포영화를 오마주한 데 이어 이번 작업에서도 히치콕 등 고전 영화가 등장하고, 제목과 연동하듯 방황하는 아빠가 위안을 찾으러 방문하는 극장이 중요한 배경으로 기능한다. 심지어 극장 이름도 그리스 신화 속 낙원을 이르는 '아르카디아'다. 현실에 정착하지 못해 회한에 신음하는 실패한 지식인이 쫓는 미련을 더없이 영화적으로 묘사하는 접근 아닐까.
영화는 아련한 몽환과 기묘한 여백으로 넘실댄다. 여기엔 특별한 이유가 있으니 <남쪽>을 다 본 후 인터넷을 검색해보자. 감독의 아쉬움과 별개로 미완의 영화는 자체로 휼륭하지만, 최초의 비전은 포기할 수 없었다. 무려 40년 후 등장한 후속작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감독의 오랜 화두를 구현한 '완전판'이다. 그래서 <남쪽>을 보고 나면 전작과 후속작을 마저 찾고, 그 소우주를 체험한 감격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영화가 역사를 기억하고 사유하는 결정적 형태다.
<작품정보>
남쪽El surThe South1983 스페인 드라마, 미스터리, 로맨스2026.02.18. 개봉 94분 12세 관람가감독 빅토르 에리세출연 손솔레스 아랑구렌, 이시아르 볼라이인, 오메로 안토누티, 롤라 카르도나원작 아델라이다 가르시아 모랄레스 - 소설 《남쪽》수입/배급 엠엔엠 인터내셔널제공 ㈜레드아이스엔터테인먼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