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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력적인 남자, 침실에서도 통한다
진정한 매력은 단지 외모나 말솜씨에서 비롯되지 않습니다. 신뢰, 자신감,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의 준비가 어우러질 때, 남자는 비로소 진짜 매력적인 존재로 완성됩니다. 특히 사랑하는 파트너와의 침실에서는 그 남자의 진짜 매력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신체적 자신감, 즉 발기력이 자리합니다. 성생활은 단순한 신체적 행위가 아니라 정서적 교감, 관계의 유지, 그리고 자존감의 핵심입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많은 남성들이 기능 저하를 경험하게 됩니다. 체력의 감소, 호르몬의 변화, 스트레스, 불안 등은 발기부전을 유발할 수 있으며 이는 남성 스스로를 위축시키고 파트너와의 거리감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더 이상 감추거나 회피할 주제가 아닙니다. 과학적 해결책이 존재하며, 그 대표적인 해답이 바로 시알리스Cialis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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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알리스는 PDE5 억제제 계열의 발기부전 치료제 중 하나로, 타다라필Tadalafil을 주성분으로 합니다. 미국 FDA를 비롯한 세계 여러 기관에서 안전성과 효과를 공식 인정받았으며, 수많은 임상 데이터를 통해 그 효능이 입증되어 왔습니다.
시알리스직구는 단순한 일회성 효과를 넘어, 남성의 생활 전반에 긍정적인 변화를 유도합니다. 특히 36시간까지 지속되는 효과는 타 약물과는 차별화되는 장점으로, 성생활의 자율성과 자연스러움을 되찾게 해줍니다. 복용 후 정해진 시간에만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 시간 내 파트너와의 교감이 있을 때 자연스러운 발기가 가능해지기에, 더욱 심리적 여유를 갖고 관계에 임할 수 있습니다.
시알리스의 특징과 장점
긴 지속력최대 36시간시알리스는 한 번 복용으로 24~36시간 동안 효과가 지속되며, 이 기간 동안 성적 자극이 있을 경우 발기가 유도됩니다. 이는 계획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자연스럽게 반응할 수 있어, 부부 또는 연인의 관계에서 긴장과 압박을 줄여줍니다.
일일 저용량 복용 가능2.5mg 또는 5mg의 저용량을 매일 복용하는 방식은 약효를 꾸준히 유지시켜, 언제든 성적 활동에 대응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들어줍니다. 특히 심리적인 불안을 감소시키고, 생활 전반에 안정감을 제공합니다.
빠른 작용과 편안한 복용법시알리스는 복용 후 약 30~60분 이내에 효과가 나타나며, 음식물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적게 받습니다. 고지방 식사 후에도 약효가 유지되므로 특별한 식이조절 없이 일상 속에서 활용하기 용이합니다.
성기능 문제, 매력을 해치는 침묵의 적
남성들은 흔히 성기능 저하를 수치스럽거나 은밀한 문제로만 여깁니다. 하지만 발기부전은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등 다양한 내과 질환과도 관련이 있으며, 치료와 관리가 반드시 필요한 건강 문제입니다. 이를 방치할 경우 신체뿐 아니라 정신적, 정서적 측면에서도 부정적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시알리스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보다 과학적이고 전문적인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기능을 회복시키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남성 스스로의 자신감을 회복하고 파트너와의 관계를 다시 활기차게 만들 수 있도록 돕습니다.
실제 사례아내의 말 한마디, 남편의 변화
한 50대 남성은 시알리스를 복용한 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날 아내가 웃으며 제 손을 먼저 잡더라고요. 오랜만에 느낀 따뜻함이었습니다. 성기능의 회복은 단지 기능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부부 사이의 애정, 대화, 교감을 회복시키는 힘이 됩니다. 시알리스는 남성 스스로뿐 아니라 관계 전체를 살리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용 시 주의사항과 안전성
시알리스는 일반적으로 안전성이 매우 높은 약물이지만, 몇 가지 중요한 주의사항이 존재합니다.
심장질환으로 니트로글리세린을 복용 중인 경우 병용 금지
지속적인 가슴통증, 협심증 이력이 있는 경우 전문가 상담 필수
음주 병용 시 저혈압이나 어지럼증 가능성
신장, 간 기능 저하 환자는 용량 조절 필요
따라서 복용 전에는 반드시 전문가의 상담을 받는 것이 권장되며, 정품 시알리스를 신뢰할 수 있는 약국에서 구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비공식 유통 경로에서 판매되는 제품은 위조 가능성이 높아 건강에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매력적인 남자의 조건준비된 자신감
외모나 화려한 말보다, 중요한 순간에 준비되어 있는 남자가 진짜 매력적입니다. 파트너와의 교감, 신뢰, 감정적 연결은 성적 만족도를 통해 더욱 강화됩니다. 침실에서의 자신감은 삶 전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일상에서도 활력과 집중력을 높여줍니다.
시알리스는 이러한 변화의 출발점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단순히 약을 먹는 것이 아닌, 스스로를 다시 신뢰하고, 파트너와의 관계를 더욱 깊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결론시알리스로 시작되는 매력의 확장
침실에서 통하는 남자란 단지 성기능이 뛰어난 남자가 아닙니다. 파트너를 배려하고, 감정을 공유하며, 필요한 순간에 준비된 자신감을 보여주는 남자입니다. 그리고 그 자신감은 과학적 근거 위에 세워질 때 더욱 견고합니다.
시알리스는 발기력 강화의 기능적 측면은 물론, 감정적 회복, 관계의 재설계까지 이끌어내는 전문적인 솔루션입니다. 단순한 약을 넘어 삶의 질을 높이는 도구로써, 이제 당신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의 매력은 지금보다 더 강해질 수 있습니다.시알리스로 준비된 남자가 되십시오.오늘 밤, 그리고 내일 아침까지 그 자신감은 계속될 것입니다.
국산비닉스정품파는곳을 찾는 소비자들이 늘어나면서, 정품 여부와 함께 국산비닉스함량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전문가에 따르면, 국산비닉스는 안정된 함량으로 효과와 안전성을 모두 확보한 제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한편, 국산비아그라모양은 해외 제품과 유사해 소비자들이 혼동할 수 있으므로, 반드시 정품 인증 여부를 확인해야 합니다. 국산비아그라복제약처방전 없이 구입 가능한 제품도 있지만, 전문가의 상담을 통해 복용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또한 국산비아그라음주 병용은 흡수율 저하와 부작용 가능성이 있으므로, 가급적 삼가는 것이 좋습니다. 모든 발기부전 치료제는 개인의 건강 상태와 생활습관에 따라 효과가 다를 수 있으므로, 전문가의 안내와 정품 구매가 가장 중요합니다.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선택이 자신감 회복의 출발점입니다.비아그라 구매 사이트에서는 비아그라 구매를 안전하게 도와드립니다. 하나약국과 비아마켓의 인기 제품부터 골드비아까지 정품만을 취급하는 믿을 수 있는 공간입니다.
기자 admin@reelnara.info
편집자주
고인을 기리는 기억의 조각, 그 곁을 치열하게 마주한 뒤 비로소 전하는 느린 부고. 가신이의 삶엔 어떤 이야기가 남아 있을까. 별세, 그 너머에 살아 숨 쉬는 발자취를 한국일보가 기록합니다.
막달레나의 집 차례상에는 골목에서 외롭게 생을 마감한 여성들의 영정이 올라와 있었다. 고 문애현 요안나 수녀와 이옥정 막달레나 공동체 대표는 이들의 곁을 지켰다. 일러스트=신동준 기자
" 릴게임추천 아이고. 단골손님 오셨네요. 이렇게 자주 오시면 안 되는데."
벽제화장장(서울시립승화원) 직원이 관을 들며 중얼거렸다. 반가움과 난처함이 뒤섞인 묘한 표정, 눈이 중년의 여성과 푸른 눈의 노년 수녀를 향했다.
"단골? 하기야. 헛말도 아니네."
'막달레나의 집(막달레나 공동체)'의 이옥정 대표가 함께 바다이야기#릴게임 온 푸른 눈의 문애현 요안나 수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 뭐, 관이나 영정을 들고 화장장을 툭하면 들락거렸으니 그리 말할 만도 하겠지. 용산 성매매 집결지에서 외롭게 생을 마감한 이들, 지금까지 이들을 몇 명이나 배웅해왔을까.
2025년 7월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막달레나 공동체 설립 40주년 기념' 미사를 위해 100여 바다이야기룰 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단상에는 그 푸른 눈의 문 수녀 영정이 놓여 있었다. "10주년, 20주년, 30주년을 모두 함께했는데 오늘은 수녀님이 안 계시네요. 많이 그립고 보고 싶습니다."
한국 첫 성매매 여성 쉼터 막달레나의 집을 공동설립한 문애현 요안나 수녀가 2024년 11월 29일 미국 뉴욕 메리놀수녀회 본원 요양원에서 선종했다. 사아다쿨 향년 94세.
문애현 수녀...사랑과 지혜로 문을 지키다
영화 한 편이 삶을 결정했다. 1930년 1월 16일 미국 뉴욕 시러큐스에서 태어난 문 수녀는 어린 시절 한센병 환자를 돌보는 수녀가 등장하는 영화를 봤다. 막연했지만, 그는 "저렇게 살고 싶다"고 결심했다. 간호사로 일했고, 1953년 메리놀수 바다이야기릴게임연타 녀회에 입회했다. 첫 소임지는 전쟁 잿더미만 남은 대한민국. 그해 9월 동료 수녀 5명과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부산항에 도착한 그는 메리놀 병원에서 일했다. 피란민만 100만 명이던 시절, 병원으로 하루에만 환자 2,000명이 몰렸다. 문 수녀는 줄 선 환자들 사이에서 위급한 이들을 추려내고, 그들에게 진료 번호표를 나눠주는 일을 맡았다. 병원 문 앞을 지키는 그는 어느새 '문 수녀'가 됐다. 한국 성(姓)씨 '문'은 그렇게 지어졌다. "약도 병상도 부족했어요. 정말 위급한 환자가 아니면 돌려보내야 했는데, 지금도 마음이 아파요. 아이를 업고 왔던 엄마가 다음 날 안 오면 '왜 안 올까' 종일 걱정했어요." 고인은 당시를 이렇게 떠올렸다.
문 수녀는 1956년부터 증평 메리놀 병원에서, 1963년부터 인천 강화도 그리스도왕 병원에서 일했다. 인천 섬유공장 밀집 지역에서 노동자 상담을 맡았던 동료 돌로레스 수녀는 그때 문 수녀의 미소를 아직 기억한다. "노동자, 환자 누구를 만나도 마음이 컸어요. 그리고 활짝 웃었어요." 그런 그에게 한 친구가 이름을 지어줬다. 사랑과 지혜, 애현(愛賢)이었다.
막달레나의 집을 세우다
1984년 10월, 문 수녀를 포함한 여자수도회 장상연합 수녀들이 용산 성매매 집결지를 찾았다. 이들을 맞이한 게 그곳 성매매 여성들을 상담해주던 이옥정 대표였다. 보험판매원으로 왔다가 참혹한 현실에 놀라 아예 현장에 눌러 앉은 지 2년째 되던 해였다.
수녀들 앞에서 여성들은 가난, 근친 강간, 미혼모, 채무, 돌봐야 할 어린 동생 등 사연을 쉼 없이 털어놨다. 문 수녀는 그 얘기를 들으며 큰 안경 너머로 눈물을 연신 닦고 있었다. "저분이 어쩌면 동료가 될지도 모르겠다." 이 대표는 막연히 생각했고, 며칠 뒤 정말 연락이 왔다. "같이 살아도 되겠습니까." "그냥 같이 있고 싶어요."
이듬해 7월 22일. 이 대표와 문 수녀, 서유석 신부가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등의 도움을 받아 성매매 집결지 골목 안에 두 칸짜리 작은 방을 마련했다. 국내 첫 성매매 여성 쉼터 '막달레나의 집'이었다. 예수를 공경했던 용감한 성녀 막달레나의 이름을 따랐다.
1985년 용산 성매매 집결지에 한국 첫 성매매 여성 쉼터 막달레나의 집이 터를 잡았다. 막달레나 공동체 제공.
그저 함께 먹고, 웃고, 지키고
골목의 여성들은 '냄비' 혹은 '기계'로 불렸다. "장사 어때?"라는 질문은 "그 집 기계 잘 돌아가냐?"는 말이 대신했다. 아팠고, 매를 맞았고, 빚에 쪼들렸다. 환각제가 없으면 손님을 받을 수조차 없었다.
법도 그들 편이 아니었다. 성매수자 말고 매매 여성만 처벌받던 시절, 손님들은 돈이나 물건을 훔치고 불을 지르고 도망갔다. 억울했지만 속으로만 끙끙 앓았다. 경찰은 상납금을 내는 업주는 두고 여성들만 단속했다. 벌을 안 받으려면 뇌물을 줘야 했다. 그렇게 빚은 또 늘어갔다.
막달레나의 집은 그런 그들 곁을 가만히 지켰다. 국수를 비벼 먹고, 미역국을 끓여 먹고, 원하면 자고 갔다. 조건을 달지 않았고, 묻지도 않았다. 자궁외 임신, 폭행, 신장병, 췌장암 등 아픈 이들이 있으면 병원을 함께 갔다. 오빠의 성폭행에 가출했던 이도, 노름으로 집을 날린 남편을 대신해 돈을 벌어야 했던 이도,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누군가는 고비를 넘겼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결국 눈을 감았다. 성매매 여성, 호객꾼, 업주, 혹은 그들 중 누군가의 어린 자녀들이 폭력, 빚, 약물, 화재에 속절없이 스러져갔다.
그들의 마지막은 유난히 쓸쓸했다. 배웅한 건 역시나 문 수녀와 이 대표뿐이었다. 누구도 그들을 애도하지 않았다. 장례를 마치고, 집결지 안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어김없이 뒤에서 "파팍" 소리와 굵은소금이 날아들었다. "에이! 재수 없어!"
고 문애현 요안나 수녀가 이옥정 막달레나 공동체 대표와 함께 하겠다고 한 이유는 하나였다. "함께 있고 싶어요." 막달레나 공동체 제공.
아침마다 용산역으로 달렸다
문 수녀는 아침마다 휴지를 들고 용산역 공동 화장실로 달렸다. 집에 화장실이 없었다. 그 모습에 동료 수녀는 펑펑 울었지만 문 수녀는 돌아올 때마다 노숙인 한 명을 데려와 아침밥을 차려줬다.
정부미로 끼니를 때웠지만, 언제나 씩씩했다. 생선을 잘못 사 온 문 수녀에게 누군가 "이건 고등어가 아니고 동태예요"라고 해도 그는 "뭐 어때요. 잘생겼잖아요"라고 답했다. 한 숟갈 뜨던 음식이 잔반으로 만든 강아지(브랜디) 밥이라는 걸 뒤늦게 알아챘을 땐 짧게 외쳤다. "브랜디야 미안하다."
1991년 문 수녀 환갑잔치가 열렸다. 잔칫날 들어서던 한 손님은 말했다. "아니 전철에서 만난 수녀님이 '뭘 그렇게 공부하시나' 봤더니 글쎄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이런 걸 외우고 계시잖아." 한참을 깔깔댔다. 이 대표가 문 수녀에게 낸 숙제였다. 그날 환갑잔치에는 동네 건달이 부른 밴드가 등장했다. 문 수녀는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만큼 노사연의 '만남'도 좋아했다.
고 김수환 추기경도 생전에 다섯 번이나 막달레나 집을 찾아 이들의 활동을 격려했다. 왼쪽부터 이옥정 막달레나 공동체 대표, 고 문애현 요안나 수녀, 고 김수환 추기경, 돌로레스 수녀. 막달레나 공동체 제공.
거기엔 아이들도 살았다
골목에는 아이들이 많았다. 엄마를 따라 살던 아이들이 있었고, 버려져 남은 아이도 그만큼 있었다. 외로웠던 여성들은 버려진 아이를 입양하듯 키웠다. 아이를 등에 업고 호객을 하기도 했다. 아이들 몇몇은 문 수녀와 이 대표가 나서 입양을 보냈다.
문 수녀는 아이들 일이라면 두 팔 걷고 나섰다. 성매매를 그만두려는 엄마들에겐 식당일, 가사도우미 일을 소개하고 응원했다. 함께 돌보는 아이의 태권도 심사 날이면 카메라를 들고 함께 나섰다. 하루는 더 빨리 취하겠다며 콜라와 함께 환각제를 먹는 엄마를 보다 못한 5세 아이가 "내가 우리 엄마 콩알 못 먹게 냉장고 콜라 다 마셔 버렸어" 하고 종알대기도 했다.
1988년 인근에 '배론 글방'을 열었다. 아이들을 보호해줄 곳이 절실했다. 호객꾼 엄마와 살며 청계천 피복공장에 취직했던 15세 여자아이가 손님이 지른 불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집에서 숨졌다. 엄마가 영업을 나간 동안 딸이 삼촌에게 성폭행당하는 일도 있었다. '돈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하길래' 싶었는지 아이들이 소매치기에 빠지기도 했다.
글방에선 자원봉사자 40여 명이 번갈아 아이들을 가르쳤다. 여성, 호객꾼, 업주 등 누구의 아이이건 관계없었다. 골목 모든 아이의 쉼터가 됐다. '공부방'이 있다는 자부심이 골목 안팎으로 번져 나갔다. 글방 초대 원장 박세옥씨는 "문 수녀님이 지원금을 마련해다 주고, 캠프·운동회에 따라나서며 아이들의 큰 어른이 돼 줬다"고 떠올렸다. "너무 애처롭게 바라보거나 심각하지는 않았어요. 문 수녀님이 활짝 웃는 얼굴로 들어서면 모든 게 괜찮은 것 같기도 했어요."
고 문애현 요안나 수녀와 동료가 배론 글방 앞을 청소하고 있다 . 막달레나 공동체 제공.
희생 아냐, 그저 함께 산 것일 뿐
막달레나의 집을 찾는 탈성매매 여성은 점점 늘어갔다. "술 따르면서 이상한 손님들한테 스트레스받는 것보다는 견딜 만하잖아." 여성들은 식당 일, 재봉 기술 등에 도전했고, 첫 월급을 타면 "큰 언니! 수녀님!"을 외치며 달려왔다. 대학까지 졸업해 학사모를 씌워주는 경사도 생겼다. 온 식구가 참기름 장사, 아이스크림 장사에 도전하기도 했다.
문 수녀는 1999년 막달레나의 집 '합숙 생활'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성서 공부모임이나 여성단체 활동은 더욱 적극적이었다. '새 세상을 여는 천주교 여성공동체' 창립멤버인 김선실씨는 "호주제 폐지 운동 등 다양한 현장을 문 수녀님이 함께 지켜줬다"고 했다.
주변에선 문 수녀가 늘 홀가분한 표정이었다고 전했다. 성미영 안젤라 수녀는 "성찰과 반성, 원망과 기쁨을 다 통과한 뒤 나온 가벼움"으로 생각했다며 "그런 모습을 늘 배우고 싶었다"고 했다.
문 수녀는 종종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고 말했지만, 고령으로 타인의 돌봄이 정작 필요한 때가 되자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했다. 짐이 되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2023년, 문 수녀는 70년에 걸친 한국 생활을 마무리하고 미국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2024년 11월 28일, 뉴욕 메리놀수녀회 본원 요양원에서 눈을 감았다. 한국에서의 추모 미사는 12월 7일 서울 합정동 전진상센터에서 봉헌됐다.
막달레나의 집 식구들은 다른 생계나 이웃과 함께 할 방법을 많이 고심했다. 한 번은 아이스크림 장사에 나서기도 했다. 막달레나 공동체 제공.
고 문애현 요안나 수녀가한 행사에서 참기름 장사에 나섰을 때의 모습. 막달레나 공동체 제공.
변했지만 여전하다. 남은 이들의 다짐
막달레나의 집이 생긴 지 꼭 40년. 그사이 '성매매 방지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 생겼고 골목이 있던 용산도 천지개벽했다. 많은 게 변했지만, 또 많은 건 여전하다. 온라인 성착취, 청소년 대상 성학대, 해외 원정 성매매, 약물 과다 투여, 조건만남 등이 새롭게 기승을 부린다. 막달레나 공동체 동료들이 위기여성지원 등에 나서며 새롭게 각오를 다지는 이유다.
홍근표 신부는 고인을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눌 뿐 아니라, 아예 누릴 것 자체를 포기하고 춥고 어려운 이의 곁을 지키며 사랑의 최절정, 존중을 보여준 분"이라고 돌이켰다. 또 "여전히 극복해야 할 일이 많아 섬기고, 동반하고, 솔선수범하고, 영감을 주는 문 수녀님의 리더십을 다시 새긴다"고 말했다.
홍 신부는 최근 막달레나의 집 추석 미사에 찾아온 탈성매매 여성의 말을 담담히 전했다. "늘 반겨 주시던 문 수녀님 모습이 생생합니다. 잊을 수가 없어요. 저도 어렵고 힘든 이를 돕는 일이라면 뭐든 하겠습니다. 같이 있을게요. 꼭 불러주세요." 문 수녀가 남긴 건 그저 곁을 내어준 하루하루였다.
그래픽=송정근 기자
이미지=챗GPT·김혜영 기자, 그래픽=송정근 기자
■ 목차별로 읽어보세요
① 비로소 부고
• 교수, 장관, 회장의 별세만 특별할까…" 미처 몰랐던 보통 삶의 비범한 희망"(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11309550004945)
• 생면부지 남을 구하려 목숨을 던졌다..."다시 돌아와도 또 도울 사람"(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11309570000462)
• 작곡가를 꿈꾼 택배기사...'어느 나라에서도 안 하는 노동'을 했다(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11310130002000)
• 가출 그리고 탈출... 꽃 피는 봄, 약속대로 아빠가 돌아왔다(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11310120004296)
• 모든 게 무너진 후, 소소는 '열무와 알타리'를 그렸다(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11309550004732)
• "뭐 이런 애들이 다 있어?"… 놀란 신부님은 아이들의 '대장'이 됐다(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11310190004994)
② 비로소 부고 Ⅱ
• 동심으로 생명을 노래하던 시인...제자들 배웅을 받으며 별이 되다(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92010330003849)
• 무덤 파던 '그 여자'...편견과 사납게 싸우고, 우아하게 눈을 감다(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92813010002672)
•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01507450003543)
• 탐사보도에 목말랐던 서른 살 기자... 불길 속에 질문을 남기고 떠났다(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02204490001757)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고인을 기리는 기억의 조각, 그 곁을 치열하게 마주한 뒤 비로소 전하는 느린 부고. 가신이의 삶엔 어떤 이야기가 남아 있을까. 별세, 그 너머에 살아 숨 쉬는 발자취를 한국일보가 기록합니다.
막달레나의 집 차례상에는 골목에서 외롭게 생을 마감한 여성들의 영정이 올라와 있었다. 고 문애현 요안나 수녀와 이옥정 막달레나 공동체 대표는 이들의 곁을 지켰다. 일러스트=신동준 기자
" 릴게임추천 아이고. 단골손님 오셨네요. 이렇게 자주 오시면 안 되는데."
벽제화장장(서울시립승화원) 직원이 관을 들며 중얼거렸다. 반가움과 난처함이 뒤섞인 묘한 표정, 눈이 중년의 여성과 푸른 눈의 노년 수녀를 향했다.
"단골? 하기야. 헛말도 아니네."
'막달레나의 집(막달레나 공동체)'의 이옥정 대표가 함께 바다이야기#릴게임 온 푸른 눈의 문애현 요안나 수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 뭐, 관이나 영정을 들고 화장장을 툭하면 들락거렸으니 그리 말할 만도 하겠지. 용산 성매매 집결지에서 외롭게 생을 마감한 이들, 지금까지 이들을 몇 명이나 배웅해왔을까.
2025년 7월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막달레나 공동체 설립 40주년 기념' 미사를 위해 100여 바다이야기룰 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단상에는 그 푸른 눈의 문 수녀 영정이 놓여 있었다. "10주년, 20주년, 30주년을 모두 함께했는데 오늘은 수녀님이 안 계시네요. 많이 그립고 보고 싶습니다."
한국 첫 성매매 여성 쉼터 막달레나의 집을 공동설립한 문애현 요안나 수녀가 2024년 11월 29일 미국 뉴욕 메리놀수녀회 본원 요양원에서 선종했다. 사아다쿨 향년 94세.
문애현 수녀...사랑과 지혜로 문을 지키다
영화 한 편이 삶을 결정했다. 1930년 1월 16일 미국 뉴욕 시러큐스에서 태어난 문 수녀는 어린 시절 한센병 환자를 돌보는 수녀가 등장하는 영화를 봤다. 막연했지만, 그는 "저렇게 살고 싶다"고 결심했다. 간호사로 일했고, 1953년 메리놀수 바다이야기릴게임연타 녀회에 입회했다. 첫 소임지는 전쟁 잿더미만 남은 대한민국. 그해 9월 동료 수녀 5명과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부산항에 도착한 그는 메리놀 병원에서 일했다. 피란민만 100만 명이던 시절, 병원으로 하루에만 환자 2,000명이 몰렸다. 문 수녀는 줄 선 환자들 사이에서 위급한 이들을 추려내고, 그들에게 진료 번호표를 나눠주는 일을 맡았다. 병원 문 앞을 지키는 그는 어느새 '문 수녀'가 됐다. 한국 성(姓)씨 '문'은 그렇게 지어졌다. "약도 병상도 부족했어요. 정말 위급한 환자가 아니면 돌려보내야 했는데, 지금도 마음이 아파요. 아이를 업고 왔던 엄마가 다음 날 안 오면 '왜 안 올까' 종일 걱정했어요." 고인은 당시를 이렇게 떠올렸다.
문 수녀는 1956년부터 증평 메리놀 병원에서, 1963년부터 인천 강화도 그리스도왕 병원에서 일했다. 인천 섬유공장 밀집 지역에서 노동자 상담을 맡았던 동료 돌로레스 수녀는 그때 문 수녀의 미소를 아직 기억한다. "노동자, 환자 누구를 만나도 마음이 컸어요. 그리고 활짝 웃었어요." 그런 그에게 한 친구가 이름을 지어줬다. 사랑과 지혜, 애현(愛賢)이었다.
막달레나의 집을 세우다
1984년 10월, 문 수녀를 포함한 여자수도회 장상연합 수녀들이 용산 성매매 집결지를 찾았다. 이들을 맞이한 게 그곳 성매매 여성들을 상담해주던 이옥정 대표였다. 보험판매원으로 왔다가 참혹한 현실에 놀라 아예 현장에 눌러 앉은 지 2년째 되던 해였다.
수녀들 앞에서 여성들은 가난, 근친 강간, 미혼모, 채무, 돌봐야 할 어린 동생 등 사연을 쉼 없이 털어놨다. 문 수녀는 그 얘기를 들으며 큰 안경 너머로 눈물을 연신 닦고 있었다. "저분이 어쩌면 동료가 될지도 모르겠다." 이 대표는 막연히 생각했고, 며칠 뒤 정말 연락이 왔다. "같이 살아도 되겠습니까." "그냥 같이 있고 싶어요."
이듬해 7월 22일. 이 대표와 문 수녀, 서유석 신부가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등의 도움을 받아 성매매 집결지 골목 안에 두 칸짜리 작은 방을 마련했다. 국내 첫 성매매 여성 쉼터 '막달레나의 집'이었다. 예수를 공경했던 용감한 성녀 막달레나의 이름을 따랐다.
1985년 용산 성매매 집결지에 한국 첫 성매매 여성 쉼터 막달레나의 집이 터를 잡았다. 막달레나 공동체 제공.
그저 함께 먹고, 웃고, 지키고
골목의 여성들은 '냄비' 혹은 '기계'로 불렸다. "장사 어때?"라는 질문은 "그 집 기계 잘 돌아가냐?"는 말이 대신했다. 아팠고, 매를 맞았고, 빚에 쪼들렸다. 환각제가 없으면 손님을 받을 수조차 없었다.
법도 그들 편이 아니었다. 성매수자 말고 매매 여성만 처벌받던 시절, 손님들은 돈이나 물건을 훔치고 불을 지르고 도망갔다. 억울했지만 속으로만 끙끙 앓았다. 경찰은 상납금을 내는 업주는 두고 여성들만 단속했다. 벌을 안 받으려면 뇌물을 줘야 했다. 그렇게 빚은 또 늘어갔다.
막달레나의 집은 그런 그들 곁을 가만히 지켰다. 국수를 비벼 먹고, 미역국을 끓여 먹고, 원하면 자고 갔다. 조건을 달지 않았고, 묻지도 않았다. 자궁외 임신, 폭행, 신장병, 췌장암 등 아픈 이들이 있으면 병원을 함께 갔다. 오빠의 성폭행에 가출했던 이도, 노름으로 집을 날린 남편을 대신해 돈을 벌어야 했던 이도,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누군가는 고비를 넘겼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결국 눈을 감았다. 성매매 여성, 호객꾼, 업주, 혹은 그들 중 누군가의 어린 자녀들이 폭력, 빚, 약물, 화재에 속절없이 스러져갔다.
그들의 마지막은 유난히 쓸쓸했다. 배웅한 건 역시나 문 수녀와 이 대표뿐이었다. 누구도 그들을 애도하지 않았다. 장례를 마치고, 집결지 안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어김없이 뒤에서 "파팍" 소리와 굵은소금이 날아들었다. "에이! 재수 없어!"
고 문애현 요안나 수녀가 이옥정 막달레나 공동체 대표와 함께 하겠다고 한 이유는 하나였다. "함께 있고 싶어요." 막달레나 공동체 제공.
아침마다 용산역으로 달렸다
문 수녀는 아침마다 휴지를 들고 용산역 공동 화장실로 달렸다. 집에 화장실이 없었다. 그 모습에 동료 수녀는 펑펑 울었지만 문 수녀는 돌아올 때마다 노숙인 한 명을 데려와 아침밥을 차려줬다.
정부미로 끼니를 때웠지만, 언제나 씩씩했다. 생선을 잘못 사 온 문 수녀에게 누군가 "이건 고등어가 아니고 동태예요"라고 해도 그는 "뭐 어때요. 잘생겼잖아요"라고 답했다. 한 숟갈 뜨던 음식이 잔반으로 만든 강아지(브랜디) 밥이라는 걸 뒤늦게 알아챘을 땐 짧게 외쳤다. "브랜디야 미안하다."
1991년 문 수녀 환갑잔치가 열렸다. 잔칫날 들어서던 한 손님은 말했다. "아니 전철에서 만난 수녀님이 '뭘 그렇게 공부하시나' 봤더니 글쎄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이런 걸 외우고 계시잖아." 한참을 깔깔댔다. 이 대표가 문 수녀에게 낸 숙제였다. 그날 환갑잔치에는 동네 건달이 부른 밴드가 등장했다. 문 수녀는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만큼 노사연의 '만남'도 좋아했다.
고 김수환 추기경도 생전에 다섯 번이나 막달레나 집을 찾아 이들의 활동을 격려했다. 왼쪽부터 이옥정 막달레나 공동체 대표, 고 문애현 요안나 수녀, 고 김수환 추기경, 돌로레스 수녀. 막달레나 공동체 제공.
거기엔 아이들도 살았다
골목에는 아이들이 많았다. 엄마를 따라 살던 아이들이 있었고, 버려져 남은 아이도 그만큼 있었다. 외로웠던 여성들은 버려진 아이를 입양하듯 키웠다. 아이를 등에 업고 호객을 하기도 했다. 아이들 몇몇은 문 수녀와 이 대표가 나서 입양을 보냈다.
문 수녀는 아이들 일이라면 두 팔 걷고 나섰다. 성매매를 그만두려는 엄마들에겐 식당일, 가사도우미 일을 소개하고 응원했다. 함께 돌보는 아이의 태권도 심사 날이면 카메라를 들고 함께 나섰다. 하루는 더 빨리 취하겠다며 콜라와 함께 환각제를 먹는 엄마를 보다 못한 5세 아이가 "내가 우리 엄마 콩알 못 먹게 냉장고 콜라 다 마셔 버렸어" 하고 종알대기도 했다.
1988년 인근에 '배론 글방'을 열었다. 아이들을 보호해줄 곳이 절실했다. 호객꾼 엄마와 살며 청계천 피복공장에 취직했던 15세 여자아이가 손님이 지른 불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집에서 숨졌다. 엄마가 영업을 나간 동안 딸이 삼촌에게 성폭행당하는 일도 있었다. '돈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하길래' 싶었는지 아이들이 소매치기에 빠지기도 했다.
글방에선 자원봉사자 40여 명이 번갈아 아이들을 가르쳤다. 여성, 호객꾼, 업주 등 누구의 아이이건 관계없었다. 골목 모든 아이의 쉼터가 됐다. '공부방'이 있다는 자부심이 골목 안팎으로 번져 나갔다. 글방 초대 원장 박세옥씨는 "문 수녀님이 지원금을 마련해다 주고, 캠프·운동회에 따라나서며 아이들의 큰 어른이 돼 줬다"고 떠올렸다. "너무 애처롭게 바라보거나 심각하지는 않았어요. 문 수녀님이 활짝 웃는 얼굴로 들어서면 모든 게 괜찮은 것 같기도 했어요."
고 문애현 요안나 수녀와 동료가 배론 글방 앞을 청소하고 있다 . 막달레나 공동체 제공.
희생 아냐, 그저 함께 산 것일 뿐
막달레나의 집을 찾는 탈성매매 여성은 점점 늘어갔다. "술 따르면서 이상한 손님들한테 스트레스받는 것보다는 견딜 만하잖아." 여성들은 식당 일, 재봉 기술 등에 도전했고, 첫 월급을 타면 "큰 언니! 수녀님!"을 외치며 달려왔다. 대학까지 졸업해 학사모를 씌워주는 경사도 생겼다. 온 식구가 참기름 장사, 아이스크림 장사에 도전하기도 했다.
문 수녀는 1999년 막달레나의 집 '합숙 생활'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성서 공부모임이나 여성단체 활동은 더욱 적극적이었다. '새 세상을 여는 천주교 여성공동체' 창립멤버인 김선실씨는 "호주제 폐지 운동 등 다양한 현장을 문 수녀님이 함께 지켜줬다"고 했다.
주변에선 문 수녀가 늘 홀가분한 표정이었다고 전했다. 성미영 안젤라 수녀는 "성찰과 반성, 원망과 기쁨을 다 통과한 뒤 나온 가벼움"으로 생각했다며 "그런 모습을 늘 배우고 싶었다"고 했다.
문 수녀는 종종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고 말했지만, 고령으로 타인의 돌봄이 정작 필요한 때가 되자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했다. 짐이 되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2023년, 문 수녀는 70년에 걸친 한국 생활을 마무리하고 미국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2024년 11월 28일, 뉴욕 메리놀수녀회 본원 요양원에서 눈을 감았다. 한국에서의 추모 미사는 12월 7일 서울 합정동 전진상센터에서 봉헌됐다.
막달레나의 집 식구들은 다른 생계나 이웃과 함께 할 방법을 많이 고심했다. 한 번은 아이스크림 장사에 나서기도 했다. 막달레나 공동체 제공.
고 문애현 요안나 수녀가한 행사에서 참기름 장사에 나섰을 때의 모습. 막달레나 공동체 제공.
변했지만 여전하다. 남은 이들의 다짐
막달레나의 집이 생긴 지 꼭 40년. 그사이 '성매매 방지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 생겼고 골목이 있던 용산도 천지개벽했다. 많은 게 변했지만, 또 많은 건 여전하다. 온라인 성착취, 청소년 대상 성학대, 해외 원정 성매매, 약물 과다 투여, 조건만남 등이 새롭게 기승을 부린다. 막달레나 공동체 동료들이 위기여성지원 등에 나서며 새롭게 각오를 다지는 이유다.
홍근표 신부는 고인을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눌 뿐 아니라, 아예 누릴 것 자체를 포기하고 춥고 어려운 이의 곁을 지키며 사랑의 최절정, 존중을 보여준 분"이라고 돌이켰다. 또 "여전히 극복해야 할 일이 많아 섬기고, 동반하고, 솔선수범하고, 영감을 주는 문 수녀님의 리더십을 다시 새긴다"고 말했다.
홍 신부는 최근 막달레나의 집 추석 미사에 찾아온 탈성매매 여성의 말을 담담히 전했다. "늘 반겨 주시던 문 수녀님 모습이 생생합니다. 잊을 수가 없어요. 저도 어렵고 힘든 이를 돕는 일이라면 뭐든 하겠습니다. 같이 있을게요. 꼭 불러주세요." 문 수녀가 남긴 건 그저 곁을 내어준 하루하루였다.
그래픽=송정근 기자
이미지=챗GPT·김혜영 기자, 그래픽=송정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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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