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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울거같은건 심호흡을 를 정말 행동을 회사에서‘하나님의 대사’라는 칭호로 널리 알려진 김하중 전 통일부장관이 지난해 9월 서울 서초구 복음통일비전 사무실에서 저자 인터뷰 후 포즈를 취하고 있다. 국민일보DB
지난 9일은 나의 팔순이었다. 지나온 인생을 돌아보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 외교관이 되어 중국과의 외교 관계 수립에 참여하고, 마지막으로 주중대사가 되는 세 가지 꿈도 다 이뤘다. 2009년 통일부 장관을 끝으로 은퇴를 하면서 나는 여생을 오로지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단했다. 이후엔 대부분의 대인관계를 단절하고 교회 관련 사역에만 집중했다. 이때 하나님이 내게 책을 쓰라는 백경게임 마음을 주셨다.
나는 지난 16년간 ‘하나님의 대사’를 비롯한 신앙 서적 10권, 전문서적 5권을 저술했다. 이 중에서 국립외교원에서 출간된 회고록 상·하 두 권은 1400쪽에 달하는 방대한 책이다. 다만 이 책들은 비매품이라 국립외교원에서는 나중에 책의 내용을 일반 대중용으로 쉽게 편집해 출간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조언해 줬다.
릴게임오션파라다이스 그간 여러 언론사에서 외교 관련 칼럼을 써 달라고 요청했으나 나는 글에 하나님에 관한 부분이 반드시 들어가야 하므로 사양해왔다. 그러던 중 국민일보에서 같은 제의가 들어왔고, 글에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가 들어가도 좋다고 해서 이 칼럼을 시작하게 됐다. 지금까지의 모든 과정이 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 생각한다. 이 지면을 통해 하나님을 믿는 분 신천지릴게임 들은 그 믿음이 깊어지기를, 그리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분은 하나님을 믿어 큰 축복을 받길 소망한다.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외교관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가졌다. 1959년 국민학교(현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친한 친구들과 장래희망을 노트에 적어 교환했는데 나는 외교관이 되겠다고 써줬다. 그 후 중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중국 역사나 문학에 관 사아다쿨 한 책을 읽으면서 외교관이 되면 막연히 중국에 가 보고 싶다는 마음을 가졌다. 1964년 고등학교 3학년 때 대학 전공을 선택할 때도 외교관이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기에 1지망은 당연히 외교학과였다. 그렇지만 2지망을 중국문학과로 할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던 중 그해 10월 중국(당시 중공)이 핵실험에 성공하는 것을 봤다. 중국 릴게임방법 에 대한 내 생각이 옳았다고 생각하고 2지망으로 중국문학과를 선택했다. 시험을 치고 나니 1지망인 외교학과에는 떨어지고 2지망인 중국문학과에 합격했다. 처음에는 재수할까 생각했지만 언젠가 앞으로 한 중 관계에도 틀림없이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냥 다니기로 했다.
69년 2월 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ROTC(학군단 7기) 소위로 임관해 전방에 있는 27사단으로 배속됐다. 거기서 2년여를 근무한 다음 1971년 6월 제대했다. 이듬해 봄 서울대 행정대학원에 입학해 학교에 다니면서 3급 공채 외무직 시험(현 외교관 후보자선발시험)을 준비했다. 73년 5월 운 좋게도 시험(7회)에 합격해 외교관이 되고 싶다는 첫 번째 꿈을 이루게 됐다.
나는 행정대학원 공부를 그만두고 외무부 외교안보연구원(현 국립외교원)에서 교육을 받았다. 7월 말 교육이 끝난 다음 여권과로 배치를 받았다. 이때 같이 간 동기가 신장범(훗날 주칠레대사) 이태식(훗날 주미대사) 유명환(훗날 외교부장관) 사무관이었다.
여권과 근무를 마치고 나는 이태식 사무관과 함께 새로 생긴 아주국의 동북아2과로 갔다. 거기서 권병현 과장(훗날 주중대사)과 근무를 했는데 과원이라고는 우리 둘과 고 김재섭 서기관(훗날 주러시아대사), 금병목 주사(훗날 주몽골대사)밖에는 없었다. 일을 하고자 해도 외교 관계가 없었기에 당시 중공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다는 게 가장 어려운 문제였다.
미국이나 일본 등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려 해도 당시는 중공에서 문화대혁명이 진행되고 있었기에 중공 내 대사관을 두고 있는 국가들도 정보를 수집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최선을 다해 매달 한 번씩 ‘중공 정세’라는 자료집을 만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빈약하기 짝이 없는 내용이었다.
얼마 후 나는 장관 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긴 권병현 과장을 따라 김동조 외무부 장관 수행비서로 근무했다. 그 당시 수행비서는 밤낮이 따로 없었다. 매일 아침 일찍 한남동에 있는 장관 공관에 가서 장관을 모시고 출근했다가 저녁 늦게 장관의 활동이 끝나면 장관 공관까지 모시고 자정 통행금지에 걸리지 않으려고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오기 바빴다.
또 일요일이나 공휴일에 장관이 골프를 치러 가면 새벽 일찍 공관에 가 장관을 수행해 골프장에 갔다. 골프가 끝날 때까지 온종일 운전기사와 함께 기다리는 게 내 일이었다. 그럼에도 장관실 근무로 여러 사람을 만나고 많은 일을 배웠다. 75년 말 김 장관이 경질되고 박동진 주유엔대사가 장관이 됐다. 나는 박 장관의 수행비서로 잠시 근무하다가 76년 3월 주뉴욕총영사관 부영사로 부임했다. 대학 졸업 후 군 복무를 마치고 외무고시에 합격해 드디어 외교관이 됐다. 사랑하는 아내, 딸과 함께 미국 근무를 하러 떠나게 되니 모든 것이 감사했다.
<약력> △1947년 강원도 원주 출생 △서울대 중문학 △제7회 외무고시 △외무부 아시아·태평양 국장 △외무부장관 특별보좌관 △대통령 의전비서관 △대통령 외교안보수석비서관 △주중국대사관 대사 △통일부장관 △현 ㈔복음통일비전 공동설립자 △온누리교회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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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은 나의 팔순이었다. 지나온 인생을 돌아보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 외교관이 되어 중국과의 외교 관계 수립에 참여하고, 마지막으로 주중대사가 되는 세 가지 꿈도 다 이뤘다. 2009년 통일부 장관을 끝으로 은퇴를 하면서 나는 여생을 오로지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단했다. 이후엔 대부분의 대인관계를 단절하고 교회 관련 사역에만 집중했다. 이때 하나님이 내게 책을 쓰라는 백경게임 마음을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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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1947년 강원도 원주 출생 △서울대 중문학 △제7회 외무고시 △외무부 아시아·태평양 국장 △외무부장관 특별보좌관 △대통령 의전비서관 △대통령 외교안보수석비서관 △주중국대사관 대사 △통일부장관 △현 ㈔복음통일비전 공동설립자 △온누리교회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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