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저널=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재일교포 이상일 감독의 연출작 《국보》가 일본 역대 실사영화 흥행 1위에 올랐다. 12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기록이다. 실사영화보다 애니메이션이 강세인 일본에서 2003년 개봉한 《춤추는 대수사선 극장판 2-레인보우 브릿지를 봉쇄하라》가 세운 1위 기록을 갈아치우기까지 무려 22년 걸렸다. 영화는 화려한 공연이 펼쳐지는 무대 위와 아래를 넘나들며 가부키 배우, 그중에서도 '온나가타(가부키 공연에서 여성 역을 맡은 남성 배우)'의 인생 여정을 들여다본다. 그 안에 인간 '국보(國寶)'가 되기 위한 릴게임종류 이들의 뜨거운 욕망과 고통에 스스로를 예속시키며 빚은 초월적 아름다움이 있다.



영화 《국보》 스틸컷 ⓒ(주)NEW


재능과 혈통, 엇갈린 운명
17세기에 탄생한 가부키는 일본의 전통 공연 예술이다. 야마토무료게임 에도 시대에 기발한 의상과 화려한 머리 모양 등으로 주목을 끌려는 '가부키 모노'가 등장했다. 이를 자신의 무용에 접목해 선보인 사람들로부터 새로운 공연 형태인 '가부키 오도리'가 탄생한 것이 시초다. 에도 막부가 풍기문란을 이유로 여성의 출연을 금지한 이후 모든 배역을 남성이 연기한다. 온나가타에게는 실제 여성일 순 없지만 평생 무대 위에서 여성의 아름다 야마토게임하기 움을 추구해야 하는 모순이 주어진다. 배우로서의 영예 속에 자리한 이 모순은 《국보》가 담아낸 모든 것의 인상적 출발점으로 보인다.
1960년대 야쿠자 수장이 연 연회에서 집안의 아들 키쿠오(구로카와 소야)가 가부키극 '세키노토'를 연기한다. 그날 키쿠오의 아버지는 반대파의 습격으로 사망한다. 오갈 곳 없는 소년을 거둔 이는 당대 가부키 오리지널골드몽 스타 하나이 한지로(와타나베 겐). 키쿠오의 재능을 알아보고 가문의 견습생으로 데려온 그는 키쿠오와 아들 슌스케(고시야마 게이타쓰) 두 사람 모두를 가부키 배우로 훈련시킨다. 둘도 없는 친구이자 라이벌로 성장한 키쿠오(요시자와 료)와 슌스케(요코하마 류세이)는 세상이 새롭게 열광하는 콤비로 성공적 데뷔를 마친다. 그러나 이후 한지로가 자신의 뒤를 이을 사람 골드몽게임 으로 키쿠오를 지목하면서 두 사람의 운명은 엇갈린다. 명망 높은 집안의 후계자가 선대의 이름과 배역을 물려받는 가부키 세계에선 이례적인 사건이다.
키쿠오는 천부적 재능을 타고났다. 슌스케에겐 혈통이 있다. 두 사람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서로의 것을 갈망한다. 타고난 피는 노력으로 메울 수 없는 영역이라는 점에서 키쿠오 쪽이 못내 더 갈급하다. 한지로의 이름을 물려받은 뒤 처음으로 무대에 서는 날, 분장실에서 긴장을 감추지 못하는 키쿠오는 슌스케에게 말한다. "내가 지금 가장 원하는 건 너의 피야. 내겐 나를 지켜줄 피가 없어. 네 피를 컵에 담아 벌컥벌컥 들이켜고 싶어." 이 처절한 고백을 시작으로 영화는 두 사람이 무대 위에서 예술혼을 공유하고, 때론 서로의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놓으며 엇갈린 길을 걷는 인생의 긴 경로를 따라간다.
이상일 감독은 전작 《악인》(2011)을 공개할 무렵부터 가부키 영화를 찍고 싶다고 문득 떠올렸다고 말한다. 다만 소재의 허들이 높았다. 용기를 내 영화화를 구체적으로 추진한 배경에는 요시다 슈이치의 원작이 있다. 작가가 3년간 직접 '구로고(くろご·가부키 무대에서 관객의 관람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검은 옷을 입고 배경 등을 움직이는 사람)'로 일하며 무대 위와 그 이면까지 관찰해 녹여 쓴 소설이다. 이로써 《국보》는 《악인》과 《분노》(2017)에 이어 이상일 감독이 요시다 슈이치의 글을 스크린에 옮긴 세 번째 작품이 됐다.
175분의 러닝타임은 가부키와 인물들의 인생을 조금의 틈도 없이 결탁해 둔다. '두 명의 등나무 아가씨' '도죠지의 두 사람' '소네자키 동반자살' '백로 아가씨' 등 대표적 공연 장면들은 키쿠오와 슌스케의 비상과 추락, 관계성의 변화와 엮인다. 관객의 시선과 동일하게 무대를 바라보던 카메라는 점차 그 방향을 뒤집어 무대 위에 선 이들의 시점으로 깊숙이 침투하며 인물들 사이의 집념과 혼란까지 구체화한다.



영화 《국보》 스틸컷 ⓒ(주)NEW


아름다운 괴물들이 되고자 한 사람들
무대를 향한 집착은 키쿠오와 슌스케를 비롯한 인물들의 것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의 기본적 태도로 발휘된다. 카메라는 완벽을 추구하는 아름다움으로 완성된 가부키 무대를 궁극의 예술 그 자체로 담아낸다. 기록 매체와 달리 막이 내리면 필연적으로 사라지고 마는 무대 공연의 움직임은 찰나이기에 더욱 순도 높은 경외의 대상으로 보인다.
그 안에서 관객이 목격하는 것은 가부키 배우의 환희와 고통이다. 빛이 밝을수록 그림자도 짙다. 예술은 인물들에게 때로는 영혼을 송두리째 파괴할 것을, 무대를 위해 인생 전체를 소모하고 바칠 것을 요구한다. 이게 아니면 살 수 없는 사람들. 오직 자신이 빚어내는 형태 안에서만 살아있음의 의미와 행복을 느끼는 존재들. 무대를 향한 열망을 빼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데다 완벽한 기술을 위해서라면 악마와 영혼을 거래하는 것도 불사하고 싶은 이들은 "아름다운 괴물"이다. 기술로 만들어내지 못할 그림이 없는 세상에서 《국보》는 오직 인간의 몸을 통해 이야기를 건넨다. 이 영화에서 인물들의 움직임은 하나의 웅변에 가깝다. 붉게 칠한 눈을 지나 목덜미부터 발끝까지, "제일 좋은 모양이 되었을 때를 뼈가 아는" 기술을 체화한 이들의 신체는 그 어떤 말과 풍광보다 방대한 스펙터클의 무대에 다름 아니다.
한편 흰 눈에 흩뿌려진 아버지의 붉은 피를 목격했던 어린 키쿠오의 잔상은 영화 내내 반복해서 변주되는 이미지다. 흰 배경은 순수함을 뜻하기보다 공연을 준비하며 가장 먼저 붓질로 몸에 흰색을 칠하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모두 비워내는 배우의 표면에 가깝다. 눈가의 붉은 칠은 혈통과 예술이라는 이름의 잔혹함을 대변한다. 한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내려놓고 예인으로 향하는 길. 비좁고 칠흑같이 어두운 복도를 통과해 무대로 향하는 이들의 걸음은 매번 새로 태어나는 존재의 그것에 가깝다. 키쿠오의 또 하나의 잔상은 흩날리는 눈발 같기도 하고 무대 아래로 떨어지는 꽃가루 같기도 한 무언가다. 영화는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서술하진 않지만, 인생 전체를 걸었던 사람만이 볼 수 있는 어떤 풍경임에는 분명하다. "참으로 아름답구나." 만족감에 뒤따라오는 회한까지 응축해 오직 이 나지막한 한마디만이 가능한.
몇 년씩 거칠게 시간을 점프하며 수십 년의 세월을 담은 이 영화는 인생의 흐름을 닮았다. 또렷한 인과를 제시하기보다, 일어나는 일의 이유를 일일이 알 수도 없으며 때론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삶의 모양에 가장 근접하려 한 선택으로 보인다. 그 결과 '숏폼'의 시대를 역행하며 3시간에 육박하는 러닝타임을 가지게 됐으며, 요즘 젊은 세대와는 접점이 옅어진 전통적 공연 예술을 소재로 하고, 장르적 성격과는 저만치 떨어진 영화로서 세운 《국보》의 기록은 괄목할 만하다. '가장 그 나라다운 것'을 이야기한 사람이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한국의 뿌리를 가진 연출가라는 사실도 모순적이기에 더욱 흥미롭다. 혈통을 중시하고 가문의 대를 잇는 사회문화적 배경이 아직도 짙게 존재하는 일본 사회에서 경계인으로서 살아온 감독의 인생 궤적이 《국보》에 겹쳐 보이는 것은 어쩌면 가장 자연스러운 정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