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위한 서프라이즈, 레비트라와 함께한 사랑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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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위한 서프라이즈,
레비트라와 함께한 사랑의 순간
서프라이즈, 그녀를 위한 완벽한 선물
사랑하는 사람에게 특별한 순간을 선물하고 싶다면,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성과 준비입니다. 사랑의 표현은 단순히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과 마음으로 전달되는 것입니다. 그중에서 데이트나 이벤트를 통해 특별한 순간을 준비하는 것은 사랑을 더욱 깊고 진지하게 만드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 그녀를 위한 서프라이즈를 준비하면서, 그 순간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성적 자신감과 신체적인 만족도도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완벽한 선물을 선사하려면, 신체적으로도 최상의 상태에서 그 순간을 맞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때 레비트라가 등장합니다.
레비트라는 발기부전 치료제이지만, 그 이상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이 약물은 발기부전뿐만 아니라, 성적 자신감 회복과 지속적인 성생활의 질 개선을 목표로 설계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준비한 서프라이즈를 완벽하게 실행하려는 순간, 레비트라는 당신의 성적 만족을 높이고 특별한 사랑의 시간을 만들어주는 완벽한 도우미가 될 수 있습니다.
레비트라의 원리와 효과
레비트라는 비아그라, 시알리스와 함께 대표적인 발기부전 치료제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레비트라만의 독특한 특징과 효과 덕분에 많은 남성들이 선호하는 약물이 되었습니다. 레비트라는 베다필이라는 성분을 주성분으로 포함하고 있으며, 발기부전 치료 외에도 지속적인 성적 만족을 위해 설계되었습니다.
1. 작용 원리발기부전 치료와 성적 자신감 향상
레비트라는 PDE5 억제제로, 이 성분은 혈관을 확장시키고 성기 주변의 혈류를 증가시킵니다. 혈류가 원활하게 이루어지면 발기부전 증상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되며, 성적인 자극에 대해 자연스러운 반응을 이끌어냅니다. 이 과정에서 신체적으로 최적화된 상태로 사랑하는 사람과의 특별한 순간을 즐길 수 있게 됩니다.
또한, 레비트라는 빠르게 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에 사랑의 순간을 더욱 진지하고 완벽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약 30분에서 1시간 내에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하며, 성적 활동 전 복용하면 자연스러운 발기와 성적 만족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2. 지속적인 효과장시간 지속되는 발기력과 만족감
레비트라는 12시간 이상의 지속 시간을 제공합니다. 이는 데이트나 특별한 순간이 예상보다 길어지더라도, 지속적인 발기력과 성적 만족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레비트라의 효과는 하루에 한 번 복용으로 충분하며, 두 사람만의 특별한 순간에 성적 자신감을 높이고, 만끽할 수 있는 완벽한 성적 파트너가 되어줍니다.
3. 자연스러운 성적 경험을 위한 신뢰
레비트라는 부작용이 적고 안전성이 뛰어난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성적인 경험을 자연스럽고 믿을 수 있는 방식으로 만들어줍니다. 약물을 복용하고 나서 성적 자극에 따라 발기가 이루어지므로, 불필요한 강제적인 효과 없이 자연스러운 성적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성적 경험의 만족도가 높아지고, 그 순간을 더욱 진지하게 즐길 수 있습니다.
그녀와의 서프라이즈, 레비트라로 완성된 특별한 시간
이제 중요한 것은 레비트라를 통해 여러분이 준비한 서프라이즈의 완성도입니다. 한 번의 데이트, 특별한 시간, 혹은 깜짝 이벤트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 생각해 보세요. 그녀와 함께하는 순간은 단순한 데이트의 시간이 아니라,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기념할 수 있는 중요한 순간입니다.
레비트라는 그 특별한 순간을 완벽하게 만들어주는 조력자가 될 수 있습니다. 성적 만족도가 높아지면, 두 사람 사이의 친밀감과 사랑의 표현도 자연스럽게 더 깊어집니다. 또한, 자신감 회복과 성적 성취감이 성적 만족도를 높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녀에게 기대 이상의 서프라이즈와 사랑의 경험을 선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레비트라의 사용법과 유의사항
레비트라는 성적 활동 전 약 30분에서 1시간 전에 1정을 복용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약물은 식사와 관계없이 복용할 수 있으며, 알콜이나 과도한 기름진 음식이 효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적당한 식사 후 복용이 권장됩니다.
1. 적절한 복용 시기
레비트라는 성적 활동을 앞두고 30분에서 1시간 전에 복용하는 것이 이상적입니다. 효과는 대개 30분 이내에 나타나며, 최대 12시간까지 효과가 지속됩니다. 따라서, 중요한 데이트나 특별한 순간에 레비트라를 미리 준비하여 성적 만족감을 높일 수 있습니다.
2. 복용 시 주의사항
레비트라는 전문가 상담을 권장드리며, 심각한 심장 질환이나 저혈압, 고혈압 등의 문제가 있는 분은 사용을 피해야 합니다. 또한, 다른 성기능 치료제와의 병용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레비트라로 완성된 사랑의 순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준비한 서프라이즈는 그 자체로 큰 의미를 지닙니다. 하지만 그 순간을 완벽하게 완성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레비트라입니다. 성적 자신감을 회복하고, 발기력과 성적 만족도를 높여 그녀에게 최상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은 특별한 시간의 가치를 더욱 깊게 만듭니다.
레비트라는 단순히 발기부전 치료제를 넘어, 여러분의 사랑을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완벽한 도우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특별한 순간을 자신감을 가지고 즐기며, 그 순간을 오래도록 기억에 남게 만드는 성적 만족의 비결을 제공합니다. 그녀와 함께하는 서프라이즈를 완성하려면, 레비트라와 함께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입니다.
내과 비아그라 처방을 받으려면 전문가와 상담 후 적절한 용량을 결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많은 분들이 네노마정 vs 프릴리지를 비교하며 고민하는데, 두 제품은 용도와 성분이 다르므로 개인에게 맞는 선택이 필요합니다. 또한, 녹내장 비아그라 복용 시에는 반드시 전문 상담이 필요하며, 부작용 가능성을 고려해야 합니다. 한편, 녹십자 비맥스 가격은 구매처에 따라 차이가 있으니 신중히 비교 후 선택하는 것이 좋습니다. 건강한 삶을 위해 하나약국에서 올바른 정보를 확인하세요
기자 admin@slotmega.info
일러스트=한상엽
“‘무상몰수·무상분배’ 북한의 토지개혁은 성공했고, ‘유상매수·유상분배’ 남한의 농지개혁은 실패했다.”
1980~1990년대 대학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한 운동권 선배들의 소위 ‘의식화 교육’에서 ‘북한 체제의 우월성’을 설명할 때 빠지지 않았던 논거였다. 실상 ‘역사적 사실’은 이와는 정반대였다. 집단농장에 예속된 북한 농민들은 단 한 평의 농지도 소유하지 못했고, 남한 농민들은 헌법·법률을 위반한 불법 임대차나 직접 농사가 어려운 고령 지주의 농지 등 지극히 제한적인 예 바다이야기게임기 외를 제외하면, 모두 자기 땅에서 농사를 짓는 자작농이었다. 그럼에도 운동권 선배들의 강압적인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12년 주입식 교육의 폐해’ 때문이었는지, 이에 대해 신입생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왜 북한은 혁명적 농지개혁에 성공했는데 남한은 동일한 여러 조건을 갖추었으면서도 북한과 같은 농지개혁에 실패했나?”(강정구, ‘ 바다신2게임 남북한 농지개혁 비교연구’, 1990)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논문이 학술지에 실린 것을 보면, 이는 일부 운동권만의 ‘망상’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남북한 토지(농지)개혁의 성패는 적어도 1980~1990년대 남한 지식인들의 뇌리에는 사실과는 정반대로 ‘주입’되었고, 그들 중 일부는 그때 주입된 ‘가짜 정보’를 아직도 바로잡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릴게임바다이야기사이트
북한 토지개혁 포스터. 북한은 농민에게 토지 소유권을 무상 분배하는 것처럼 선동했지만, 농민이 실제 분배받은 것은 매매·저당·상속이 불가능한 경작권에 불과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반도 반만년 역사 동안 농민의 꿈은 ‘자기 쿨사이다릴게임 땅’에서 농사를 짓는 것이었다. 1946년 김일성의 임시인민위원회는 ‘무상몰수·무상분배’ 토지개혁을 통해 마치 그 꿈이 실현된 것처럼 ‘거짓 선동’했다. 그러나 북한이 지주에게서 땅을 빼앗은 것은 사실이었으나 농민에게 분배한 것은 ‘매매·저당·상속’이 불가능한 ‘경작권’에 불과했다. 게다가 매년 수확량의 25%를 현물세로 받아 갔다. 비유하자면, ‘서울 자 골드몽게임 가(自家) 아파트’가 꿈인 서민들에게 ‘영구임대아파트 입주권’을 나눠주고 해마다 소득의 25%씩을 임대료로 징수해 가면서도, 정작 ‘서울 아파트는 서민의 것!’이라는 달콤한 구호로 진실을 호도한 셈이었다.
더욱이 1954~1958년 ‘농업 집단화’로 북한 농민들은 경작권마저 ‘협동조합’에 반강제로 넘겨야 했다. 농민의 ‘자본주의적 소유욕’은 충족시켜 주지 못했을지언정 결과라도 성공적이었느냐면, 간신히 버텨가던 북한 농업은 1994년 ‘고난의 행군’으로 완전히 붕괴해 세계 최빈국 수준으로 전락했다. 이처럼 계획부터 결과까지 북한의 토지개혁에서 ‘성공’이라 평가할 부분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다.
그에 반해 남한에서는 농지개혁 이전 총경작지의 35%에 불과했던 자작지가 이후 92~96% 수준으로 증가했다. 또한 1948년 남한 인구의 70.9%가 농민이었고, 그중 80% 이상이 소작농 또는 자소작농이었지만, 농지개혁 이후에는 원칙적으로 모든 농민이 자작농이 됐다. 분배받은 권리도 ‘매매·저당·상속’이 모두 가능한 ‘순도 100% 소유권’이었다. 그 덕분에 대부분의 농민들이 1960년대 이후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돼 가난에 허덕였을망정, 땅을 팔아 자식들 공부시키는 것도, 도시의 확장 과정에서 자기 소유의 농지가 수용되거나 용도 변경돼 ‘인생 역전’의 기회를 얻는 것도 가능해졌다.
‘유상’이라고 하나 남한 농민의 농지 대금 상환 조건은 ‘무상’이라고 호도한 북한보다 오히려 나았다. 1949년 4월, 국회를 통과한 농지개혁법은 정부가 3정보(9000평) 이상 농지를 소유한 지주에게 연평균 생산량의 150%에 해당하는 지가증권을 주고 매수하고, 농지를 분배받은 농민은 생산량의 125%를 매년 25%씩 5년에 걸쳐 균등 상환하게 했다. ‘경작권’을 분배받은 북한 농민은 현물세 25%를 영구히 부담해야 했지만, 남한 농민은 같은 수준의 상환 대금을 5년만 납부하면 농지의 등기를 넘겨받을 수 있었다.
농지개혁 당시 발행한 지가증권. 정부는 재정 부담을 덜기 위해 지주들에게 농지 매수 대금을 현금 대신 지가증권으로 지급했다. 귀속재산 대금 결제 수단으로 이용 가능해서 6·25전쟁 이후 대부분 헐값으로 매각됐다. /국사편찬위원회
그러나 실제 농지개혁은 1949년 4월 국회를 통과한 법안대로 추진되지는 않았다. 이승만 정부는 지주로부터 매수하는 가격과 농민에게 분배하는 가격 사이의 ‘차액 25%’를 정부가 부담하면 국가 재정이 어려워진다는 이유에서 그 차액 부분을 수정해 달라고 법안을 국회로 돌려보냈다. 사실상 거부권을 행사한 것이었지만, 같은 해 6월 15일 국회는 재표결 끝에 원안대로 법안을 확정했다. 국회와 정부는 그 후로도 1년 가까이 개정을 협의해 1950년 3월 10일 농민이 생산량의 30%씩 5년에 걸쳐 균등 상환하도록 함으로써 지주 보상과 농민 상환을 150%로 일치시킨 개정 농지개혁법을 공포했다.
남한의 농지개혁 성과를 폄훼하는 세력은 더 나은 개혁 방안을 찾기 위해 1년여 기간 국회와 정부가 협의한 것을 두고, 마치 이승만 대통령이 농지개혁 자체를 반대한 것처럼 거짓 선동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농지개혁을 반대하기는커녕 남한의 산업화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구축하기 위해 공무원들을 독려해 가며 이를 앞장서서 추진했다. 농지개혁은 민국당(한민당의 후신), 남로당이 반분했던 농민의 지지를 일거에 이승만과 대한민국으로 돌려놓은 이승만 정부의 정치적 승부수였다.
이승만 정부는 국회와 농지개혁법 개정을 논의하는 동안에도 농지개혁을 착실히 준비했다. 개정안이 통과된 직후 ‘속도전’으로 밀어붙여 1950년 3월에서 5월 사이 대상 농지 70~80%의 분배를 완료했다. 농지개혁의 혜택을 입은 농가는 전체 농가 240만 호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150만여 호에 달했다.
이렇듯 농민 대다수가 자기 땅을 소유하게 된 상태에서 6·25전쟁이 발발했다. 인민군이 남한 점령지에서 북한에서와 같은 토지개혁을 실시했지만, 전쟁 전 이미 농지를 분배받았던 대다수 농민들은 경작권밖에 주지 않는 ‘북한식 토지개혁’에 시큰둥했다. 더욱이 농지 재분배를 주도한 ‘붉은 완장 찬’ 머슴과 빈농이 양질의 논을 선점하는 등 농간을 부려 농민들로부터 더 큰 반발을 샀다.
6·25전쟁 기간 이승만 정부는 전시(戰時) 세수 확보를 위해 농지 상환금 외에도 ‘임시토지수득세’를 부과해 농민들이 생산한 식량의 절반 이상을 징수했다. 그럼에도 농민들은 “인민공화국 치하보다는 낫다”고 생각하고,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웠다. 남로당의 거짓 선동에 솔깃했던 농민을 확실한 대한민국 지지 세력으로 돌려놓은 농지개혁은 6·25전쟁 이래 대한민국을 지켜낸 견고한 방어벽이었다.
<참고 문헌>
강정구, 남북한 농지개혁 비교연구, 경제와 사회 제7권, 1990
권기돈, 오늘이 온다, 소명출판, 2022
김일영, ‘농지개혁을 둘러싼 신화의 해체’,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책세상, 2006
“‘무상몰수·무상분배’ 북한의 토지개혁은 성공했고, ‘유상매수·유상분배’ 남한의 농지개혁은 실패했다.”
1980~1990년대 대학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한 운동권 선배들의 소위 ‘의식화 교육’에서 ‘북한 체제의 우월성’을 설명할 때 빠지지 않았던 논거였다. 실상 ‘역사적 사실’은 이와는 정반대였다. 집단농장에 예속된 북한 농민들은 단 한 평의 농지도 소유하지 못했고, 남한 농민들은 헌법·법률을 위반한 불법 임대차나 직접 농사가 어려운 고령 지주의 농지 등 지극히 제한적인 예 바다이야기게임기 외를 제외하면, 모두 자기 땅에서 농사를 짓는 자작농이었다. 그럼에도 운동권 선배들의 강압적인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12년 주입식 교육의 폐해’ 때문이었는지, 이에 대해 신입생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왜 북한은 혁명적 농지개혁에 성공했는데 남한은 동일한 여러 조건을 갖추었으면서도 북한과 같은 농지개혁에 실패했나?”(강정구, ‘ 바다신2게임 남북한 농지개혁 비교연구’, 1990)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논문이 학술지에 실린 것을 보면, 이는 일부 운동권만의 ‘망상’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남북한 토지(농지)개혁의 성패는 적어도 1980~1990년대 남한 지식인들의 뇌리에는 사실과는 정반대로 ‘주입’되었고, 그들 중 일부는 그때 주입된 ‘가짜 정보’를 아직도 바로잡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릴게임바다이야기사이트
북한 토지개혁 포스터. 북한은 농민에게 토지 소유권을 무상 분배하는 것처럼 선동했지만, 농민이 실제 분배받은 것은 매매·저당·상속이 불가능한 경작권에 불과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반도 반만년 역사 동안 농민의 꿈은 ‘자기 쿨사이다릴게임 땅’에서 농사를 짓는 것이었다. 1946년 김일성의 임시인민위원회는 ‘무상몰수·무상분배’ 토지개혁을 통해 마치 그 꿈이 실현된 것처럼 ‘거짓 선동’했다. 그러나 북한이 지주에게서 땅을 빼앗은 것은 사실이었으나 농민에게 분배한 것은 ‘매매·저당·상속’이 불가능한 ‘경작권’에 불과했다. 게다가 매년 수확량의 25%를 현물세로 받아 갔다. 비유하자면, ‘서울 자 골드몽게임 가(自家) 아파트’가 꿈인 서민들에게 ‘영구임대아파트 입주권’을 나눠주고 해마다 소득의 25%씩을 임대료로 징수해 가면서도, 정작 ‘서울 아파트는 서민의 것!’이라는 달콤한 구호로 진실을 호도한 셈이었다.
더욱이 1954~1958년 ‘농업 집단화’로 북한 농민들은 경작권마저 ‘협동조합’에 반강제로 넘겨야 했다. 농민의 ‘자본주의적 소유욕’은 충족시켜 주지 못했을지언정 결과라도 성공적이었느냐면, 간신히 버텨가던 북한 농업은 1994년 ‘고난의 행군’으로 완전히 붕괴해 세계 최빈국 수준으로 전락했다. 이처럼 계획부터 결과까지 북한의 토지개혁에서 ‘성공’이라 평가할 부분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다.
그에 반해 남한에서는 농지개혁 이전 총경작지의 35%에 불과했던 자작지가 이후 92~96% 수준으로 증가했다. 또한 1948년 남한 인구의 70.9%가 농민이었고, 그중 80% 이상이 소작농 또는 자소작농이었지만, 농지개혁 이후에는 원칙적으로 모든 농민이 자작농이 됐다. 분배받은 권리도 ‘매매·저당·상속’이 모두 가능한 ‘순도 100% 소유권’이었다. 그 덕분에 대부분의 농민들이 1960년대 이후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돼 가난에 허덕였을망정, 땅을 팔아 자식들 공부시키는 것도, 도시의 확장 과정에서 자기 소유의 농지가 수용되거나 용도 변경돼 ‘인생 역전’의 기회를 얻는 것도 가능해졌다.
‘유상’이라고 하나 남한 농민의 농지 대금 상환 조건은 ‘무상’이라고 호도한 북한보다 오히려 나았다. 1949년 4월, 국회를 통과한 농지개혁법은 정부가 3정보(9000평) 이상 농지를 소유한 지주에게 연평균 생산량의 150%에 해당하는 지가증권을 주고 매수하고, 농지를 분배받은 농민은 생산량의 125%를 매년 25%씩 5년에 걸쳐 균등 상환하게 했다. ‘경작권’을 분배받은 북한 농민은 현물세 25%를 영구히 부담해야 했지만, 남한 농민은 같은 수준의 상환 대금을 5년만 납부하면 농지의 등기를 넘겨받을 수 있었다.
농지개혁 당시 발행한 지가증권. 정부는 재정 부담을 덜기 위해 지주들에게 농지 매수 대금을 현금 대신 지가증권으로 지급했다. 귀속재산 대금 결제 수단으로 이용 가능해서 6·25전쟁 이후 대부분 헐값으로 매각됐다. /국사편찬위원회
그러나 실제 농지개혁은 1949년 4월 국회를 통과한 법안대로 추진되지는 않았다. 이승만 정부는 지주로부터 매수하는 가격과 농민에게 분배하는 가격 사이의 ‘차액 25%’를 정부가 부담하면 국가 재정이 어려워진다는 이유에서 그 차액 부분을 수정해 달라고 법안을 국회로 돌려보냈다. 사실상 거부권을 행사한 것이었지만, 같은 해 6월 15일 국회는 재표결 끝에 원안대로 법안을 확정했다. 국회와 정부는 그 후로도 1년 가까이 개정을 협의해 1950년 3월 10일 농민이 생산량의 30%씩 5년에 걸쳐 균등 상환하도록 함으로써 지주 보상과 농민 상환을 150%로 일치시킨 개정 농지개혁법을 공포했다.
남한의 농지개혁 성과를 폄훼하는 세력은 더 나은 개혁 방안을 찾기 위해 1년여 기간 국회와 정부가 협의한 것을 두고, 마치 이승만 대통령이 농지개혁 자체를 반대한 것처럼 거짓 선동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농지개혁을 반대하기는커녕 남한의 산업화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구축하기 위해 공무원들을 독려해 가며 이를 앞장서서 추진했다. 농지개혁은 민국당(한민당의 후신), 남로당이 반분했던 농민의 지지를 일거에 이승만과 대한민국으로 돌려놓은 이승만 정부의 정치적 승부수였다.
이승만 정부는 국회와 농지개혁법 개정을 논의하는 동안에도 농지개혁을 착실히 준비했다. 개정안이 통과된 직후 ‘속도전’으로 밀어붙여 1950년 3월에서 5월 사이 대상 농지 70~80%의 분배를 완료했다. 농지개혁의 혜택을 입은 농가는 전체 농가 240만 호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150만여 호에 달했다.
이렇듯 농민 대다수가 자기 땅을 소유하게 된 상태에서 6·25전쟁이 발발했다. 인민군이 남한 점령지에서 북한에서와 같은 토지개혁을 실시했지만, 전쟁 전 이미 농지를 분배받았던 대다수 농민들은 경작권밖에 주지 않는 ‘북한식 토지개혁’에 시큰둥했다. 더욱이 농지 재분배를 주도한 ‘붉은 완장 찬’ 머슴과 빈농이 양질의 논을 선점하는 등 농간을 부려 농민들로부터 더 큰 반발을 샀다.
6·25전쟁 기간 이승만 정부는 전시(戰時) 세수 확보를 위해 농지 상환금 외에도 ‘임시토지수득세’를 부과해 농민들이 생산한 식량의 절반 이상을 징수했다. 그럼에도 농민들은 “인민공화국 치하보다는 낫다”고 생각하고,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웠다. 남로당의 거짓 선동에 솔깃했던 농민을 확실한 대한민국 지지 세력으로 돌려놓은 농지개혁은 6·25전쟁 이래 대한민국을 지켜낸 견고한 방어벽이었다.
<참고 문헌>
강정구, 남북한 농지개혁 비교연구, 경제와 사회 제7권, 1990
권기돈, 오늘이 온다, 소명출판, 2022
김일영, ‘농지개혁을 둘러싼 신화의 해체’,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책세상, 2006








